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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화예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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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5 18:27 조회1,9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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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화예술운동 


1970년대를 말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전태일과 김지하다. 전태일의 분신이 가져온 충격은 사회 전반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연평균 10% 이상의 화려한 경제성장의 이면에 노동자들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이 나라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적인, 인간다운 삶을 위한 운동의 화두는 전태일이었다. 1970년 5월 『사상계』에 실린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문화예술계에 던진 충격도 거의 지진에 가까웠다. 1970년대 거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그의 삶만큼이나 격렬했던 그의 작품들은 문화예술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중의 해방을 꿈꿨던 모든 이들에게 또 하나의 화두였다. 비록 1980년대 그의 일련의 발언들이나 작품들이 1970년대의 그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긴 것도 사실이었으나, 1970년대의 김지하는 분명 이 나라 문화예술계의 걸어 다니는 운동 그 자체였다. 오적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에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겄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나라를 좀먹는 오적으로 규정하고, 썩은 현실에 대해 통렬히 풍자한 이 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킬킬대고 한편으로는 이 시인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결국 김지하는 1970년대 내내 칠전에 끌려가 볼기가 확확 불이 나도록 매를 맞아야만 했다. 오적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충격이었다. 전통의 판소리 가락으로 일관한 이 시는 1960년대 참여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김수영, 신동엽과는 분명히 다른 또 다른 참여시, 참여예술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김지하는 김준태와의 편지 속에서 “저항의 형식”이 “민예(民藝)” 속에서 혈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이 땅의 민중의 전통과 민주주의, 민중 해방을 결합시켜 우리식의 저항, 우리식의 참여예술을 하자는 것이다. 김지하는 1964년 5월 서울대에서 일어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쓴 것을 시작으로, ‘황톳길’에서의 향토색 짙은 서정을 거쳐, 마침내 우리 전통의 가락에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분노, 갈망, 의지 등을 나타낼 형식을 찾아내었다. 김지하는 이러한 시를 스스로 담시(譚詩)라고 불렀다. 


담시는 아니었지만 김수영, 신동엽의 뒤를 잇는 참여시 또한 70년대를 거치면서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 신경림은 경제개발의 이면에서 희생당하는 농민의 정서를 노래하였고, 조태일은 분단의 아픔을, 이성부는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도시 서민들의 애환을, 정희성은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저항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질수록 시인들의 붓끝도 날카로워졌다. 1975년 양성우는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양성우, 겨울공화국에서)”라며 유신체제에 직격탄을 날렸고, 고은은 1974년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몇 십 년 동안 가진 것,/몇 십 년 동안 누린 것,/몇 십 년 동안 쌓은 것,/행복이라던가/뭣이라던가/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며 유신과 결연히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1971년 황석영은 『창작과 비평』에 실린 소설 「객지」에서 앞으로 노동문제가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가 될 것임을 예언했다. 한 간척 공사장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투쟁과 패배 과정을 절제된 시선으로 그려낸 이 소설에서 황석영은 비록 소설에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역사의 주체로서 성장해 가는 노동자의 미래에 대하여 굳건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1978년 발표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은강그룹으로 대표되는 독점재벌과 난장이 가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가족의 삶이 대조되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파렴치한 가진 자에 대한 노동자의 적개심은 끝내 살인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재벌 회장에 대한 적개심에 회장을 죽이려다 회장 동생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은 영수, 빼앗긴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몸까지 판 영희,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난장이 아버지, 이들은 모두 자본가의 욕심에 파멸당해가는 70년대 이 땅의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1971년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이 허위의식을 버리고 민중과 하나되는 과정을 그렸다. 이 세 소설은 1980년대 이 땅의 민중운동을 예견한 소설이었다. 


한편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들도 문학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전적인 수기의 형식이었지만, 유동우의 『어느 돌맹이의 외침』,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등은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각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소수 선각자들의 외침으로부터 시작한 현실참여의 문예운동은 1970년대 들어 양적 질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아갔다. 1974년 11월 18일 문학인 101인 선언이 발표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이 창립되었다. 1974년 1월 이미 문인들도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에 참가하여 문인61인 개헌지지선언을 발표한 후였다. 자실의 출범은 이 땅의 문인들도 이제 조직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대중 앞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편 김지하의 새로운 시도는 시를 넘어 계속되었다. 1973년 김지하가 원작, 연출한 ‘진오귀굿’은 우리 전통의 마당극에 저항의 정신을 접목한 것이었다. 김지하는 이 극에서 ‘오구’ 또는 ‘오구굿’이라는 전통 농민극의 형식을 빌려 농촌경제를 피폐시키는 수해귀, 외곡귀, 소농귀 등과 농민의 한 판 투쟁을 극화하였다. 탈춤의 형태였으므로 무대가 아니라 당연히 마당에서 공연되었다. 이는 배우와 관객이 분리된 기존의 연극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였다. 관객과 배우는 이제 살아 생동하는 마당에서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였다. 마당극에서 관객은 이제 더 이상 구경만 하는 수동적 존재기 아니라 함께 공연하는 주체적 존재였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 저항의 형식을 찾자는 이 새로운 문화운동은 학교와 교회, 공장과 농촌 현장으로 급속히 전파되어갔다. 각 대학에서 탈춤반이나 전통문화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탈춤반이나 전통문화연구회는 학생운동의 주요한 조직적 거점이 되었다. 1975년 5월 서울대에서 벌어진 5.22사건은 탈춤반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1974년 4월에는 우리 전통문화를 연구, 공연하는 모임 한두레가 창립되었다. 한두레는 74년 10월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을 풍자하는 소리굿이자 마당극 ‘아구’를 공연하였다. 이후 황석영 원작의 「돼지꿈」, 이근삼 원작의 「유랑극단」 등 사회비판적인 소설이나 희극들이 마당극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마당극이 더욱 진가를 발휘한 것은 당대에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극으로 만들 때였다. 1975년의 ‘진동아굿’, 1978년의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1978년의 ‘함평고구마’, 1978년의 ‘덕산골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관객들은 극에 동참하면서 유신체제 하의 참혹한 현실에 분노하고 절규했다.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1978년 9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고난받는 동일방직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공연되었다. 이 극은 박우섭과 김봉준의 지도하에 준비되었으나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직접 창작에까지 참여했고 출연하였다. 공연 도중 그 유명한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재현될 무렵, 공연은 시위로 발전하였고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새로운 문화운동에서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1980년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임진택, 채희완, 이애주, 김민기 등은 모두 이 새로운 문화운동의 1세대들이었다. 마당극 ‘유랑극단’(1977), ‘마스게임’(1978), ‘돼지꿈’(1978) 등을 연출한 임진택은 스스로를 한목이라고 불렀다. 김지하가 두목이었기 때문이다. 김민기는 노래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였다. 공장의 여공들 기숙사 방마다 적어도 카세트라디오 한 대는 있다는 데 주목한 그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잘 맞는 매체가 카세트테이프라고 판단하고 노래극 ‘공장의 불빛’(1978)을 대량으로 찍어 배포하였다. 테이프 뒷면에는 반주만 넣어 노동자들이 직접 흥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했다. ‘공장의 불빛’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불법 테이프 복사는 제작자들이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일이었다. 이 와중인 1977년 결성된 노래패 메아리는 1980년대 우리 운동가요 대중화의 효시였다. 


1970년대 후반 이들 1세대의 뒤를 이어 장만철(장선우), 김정환, 황선진, 김봉준, 박인배, 연성수, 김명곤, 유인렬 등이 이 새로운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에 의해 1980년대 우리 문화예술운동은 시, 소설, 연극, 음악, 미술 등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발전하였다. 이들의 문화예술 활동은 1980년대 우리 민주화투쟁의 거의 모든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하였다.


내용출처 : http://www.kdemocracy.or.kr/ [200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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