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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동지회, 그 정의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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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5 18:29 조회1,8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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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71동지회, 그 정의의 발자취


 이 태 호

 시사평론가 / 전동아일보 기자



1. 프롤로그


5 ·16쿠데타로 합헌적인 민주당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는 쿠데타공약 제6항에서 “양심적인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기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를 농단한 군부세력의 실질적 우두머리로 등장한 그는 정치인들이 으레 하는 식언(食言)과 위약(違約) 을 바탕으로 독재의 성을 구축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 수출주도형 고도경제성장 정책을 밀어붙여 한국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박정희, 그의 개발독재, 그의 철권정치 아래서 피를 흘려야 했던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 첫 번째 희생자 그룹은 착취의 대상이었던 노동자· 농민 · 도시 빈민들이다. 박정희가 저 임금에 기반을 두고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한 이들 계층은 고도성장의 빛에 가려진 그림자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 · 농민 · 도시 빈민들이 생존권을 위협받으면서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해줄 것을 권력에 요구할 경우 권력은 그들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두 번째 희생자 그룹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자유와 인권과 정신적 및 물질적 행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헌신했던 지식인들은 ‘풍요 속의 빈곤’에 처박혀진 노동자 · 농민 · 도시빈민의 존재를 가슴 아파하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을 타도하지 않으면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고, 노동자 · 농민 · 도시 빈민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재벌과 권력의 야합구도를 깨뜨리지 않고는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없다고 확신하고 노동자 · 농민 · 도시빈민들과 연대하는 한편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외형적으로 아무리 강한 듯하게 보이는 권력일지라도 자유권적 기본권과 생존권적 기본권을 유린당한 민중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저항할 때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볼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 농민 · 도시 빈민의 절규

 박정희의 비극은 5 · 16쿠데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천착할 경우 우리는 그가 1969년에 3선개헌을 시도한 순간부터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민주주의의 적(敵)인 온갖 부정과 착취와 억압을 보존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도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짓밟히고 얻어맞고 울먹이던 민중들은 권력자들이 민중의 복지를 외면하고 권력놀음에 탐닉하자 인내의 한계를 박차고 궐기하기 시작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시장 부근 길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숨졌다. 그는 거센 불길이 몸에 번지고 있는 순간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이 사건은 박정희 독재 아래서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항거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경기도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민중 2만여 명은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쯤“배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토지 가격을 인하하라”고 외치며 약 6시간에 걸쳐 출장소와 경찰차를 불지르고 파괴하는 등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주로 서울시내 판자촌 철거민들로 이루어진 광주대단지 민중들은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박정희의 폭력에 대응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그의 간담을 써늘케 했다.


이 해 8월 23일 아침에는 인천 앞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실미도에 수용되어 굶주리면서 살인적이라 할 정도로 강도 놓은 훈련을 받던 군특수부대원 24명이 경계병 23명을 사살하고 버스를 탈취하여 총기를 나사하면서 인천을 거쳐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까지 진출했으나 군경에 의해 모두 사살당했다. 이 사건은 서럽게 버려진 민중의 아들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후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일 때 권력이 그들을 회휴하여 북한 침투요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살인적인 훈련을 시킨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 소속 파월 기술자 4백여 명은 1971년 9월 15일 중구 소공동 KAL 빌딩으로 몰려가 “체불임금 1백49억 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호텔 정문 유리창과 로비 기물을 모두 부수고 KAL 국제매표실에 불을 지르는 등 도심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이 해외에서 중노동한 임금을 착취한 재벌을 강력히 응징한 것으로 기록된다.


수련의 파동과 사법 파동

 이처럼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던 민중이 궐기한 것과 때를 맞춰 양심을 간직하고 있던 지식인들도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국립의료원 인턴 32명은 1971년 6월 16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사표를 내고 병원을 떠났다. 이 단체행동에는 6월 22일 레지던트 60명도 참여하여 파업을 결의함으로써 도도한 흐름을 탔다. 이어서 서울대 부속병원 인턴 39명은 7월 4일 파업에 들어갔다. 8일에는 레지던트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도제와 같은 신분과 저임금에 불만이 많던 수련의들의 인권선언이라는데 의미가 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현직 판사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계기로 1971년 7월 28일 판사들이 법복을 벗어던진 이른바 ‘사법파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법관들은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검찰에 맞서 집단사표 제출로 단결력을 과시함과 아울러 사법부의 권위를 세웠다. 그러나 민복기 대법원장은 8월 27일 “ 사법부 독립을 위해 내가 앞장서겠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법관들의 사표를 철회케 했다.


민족사의 고비고비마다 양심의 보루요, 피끓는 정의의 화신으로 임해온 대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박정희의 억압체제와 인권에 목마른 민중 및 지식인의 대결구도에서 확연하게 후자의 편에 서게 된다.


그들은 한편으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며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인권투쟁을 지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체제의 횡포에 저항하고 마침내는 그것을 타도하려는 투쟁에 앞장서게 된다. 이것은 박정희와의 전면전(全面戰)을 의미한다.



2.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1969-1971)


 1)삼선개헌 반대의 깃발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는 3선개헌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본격적인 동력은 3선개헌 반대투쟁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대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 데모도 1969년부터 가열되기 시작했다. 


1969년에 1학년생으로서 3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선 학생은 1971년에 3학년생으로서 교련반대 투쟁을 벌여 위수령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이 격동의 시기에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들은 1971년에 4학년이 68학번 및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그 이상의 학번도 포함된다. 이 기간에 정의를 위해 투신한 학생들이 학생운동사에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다만 1971년에 3, 4학년생으로서 교련반대 데모를 주도하고 위수령을 맞았던 대학생들은 1969년 3선개헌 반대데모 때는 1, 2학년생으로서 데모에 참여는 했을지언정 리더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이 글은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1969년에서 1971년까지의 학생운등의 발자취를 서술하되 1971년 쪽에 비중을 더 두기로 한다.


1968년과 1969년에 입학한 대학생들은 3선개헌의 부당성, 4 · 27 대통령선거 및 5 · 25총선에서의 부정, 교련 도입 후의 대학의 병영화(兵營化) 현상 등에 우려를 함께 하고 반독재 투쟁을 대학 단위를 고립분산적으로 전개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벽을 넘어 서클간의 우대를 다지고 고등학교 인맥을 총동원하여 대학끼리 연합전선을 펴는 것이 효과적인 투쟁방법이라고 판단하여 수시로 접촉하면서 유대를 강화했다.


3선개헌은 정치 · 사회의 안정과 경제 발전과 통일의 성취라는 배경음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9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그 속마음을 내비쳤다. 그는“친애하는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은 민족의 중흥이며, 조국의 경제발전이며, 그 국력을 토대로 70년대에 제기될 통일 과업이라는 것을 나는 새삼 강조하고, 또 여러분의 새로운 인식과 자각을 촉구해두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헌법에 의해 임기가 종료되어 정치권에서 퇴장해야 할 입장인데도 70년대의 청사진을 ‘새삼 강조하고’ 나선 데 이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천 속에서 우리는 이 70년대 이후의 명백한 민족사회의 진로를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안이한 요령주의나 대의를 무시한 이기주의의 만연을 경계하고 사명감과 애국심이 바탕이 된 개척자의 기백과 실천력을 일깨워 나가야 하겠습니다”라고 역설했다.


박정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족중흥과 통일과업의 성취를 위해 정치 · 경제 ·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총력체제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관제언론을 동원하여 3선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박정희가 개발독재의 길로 치달음을 의미했다.


장기집권 음모에 저지에 나선 대학생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와 대의민주주의를 배워온 대학생들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를 방관하지 않았다. 그 데모의 첫발을 서울대생들이 내딛었다. 서울대생들의 3선개헌 반대 데모는 서클에서 이론을 무장하고 민주주의의 현실에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정의감이 투철한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김근태 등이 동력을 제공하고 1968년 또는 1969년에 입학한 1, 2학년학생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신민당은 야당의 입장에서 3선개헌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크고 작은 집회를 수시로 가졌다.


이 시기의 3선개헌 반대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단체는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였다. 1969년 2월 3일 김상돈, 이철승, 김선태 등 정치정화법 해금인사들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신민당 의원들과 연대하여 7월 17일 서울 명동에 있는 대성빌딩에서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김재준 목사, 고문에 윤보선, 유진오, 박순천, 이희승, 함석헌, 장택상 등을 추대하고 선언문과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대학가도 3선개헌 반대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헌법을 1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독재권력을 향해 법률을 공부하는 서울대 법대생들이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다. 


서울법대 학생들은 1969년 6월 12일 오전 11시 법대 합동강의실에서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헌정수호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고 “3선개헌에 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서울법대생들은 6월 16일에도 제 7강의실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3선개헌 작업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농성으로 돌입하여 6월 17일 징계학생들의 처벌 취소, 학원 내에서의 언론집회 자유의 보장 등의 요구조건을 교수회의가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이어서 서울대 문리대상 2백여 명은 6월 17일 오후 1시 4 · 19혁명기념탑 앞에 모여서 학생총회를 열고 “학원사찰의 즉각 중지 및 음성적 개헌공작의 철회”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한 “자유수호를 저지 · 와해시키려는 비합리와, 민주 · 민족의 숭고함을 외면하려는 우둔을 좌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한 후 스스로 해산했다.


서울대 공대생 5백여 명은 6월 19일 1호관 교정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만일 개한 추진 움직임이 호헌적, 건설적인 것이라면 정부는 전국민에게 이에 대한 반대 의사도 용인하라”고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서울문리대생 1백여 명은 6월 23일 4 · 19혁명기념탑 앞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3선개헌은 반민족적 · 반역사적 행위”라고 규정하고 3선개헌 저지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서울공대생과 교양과정부 학생 1천여 명은 6월 30일 교내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경찰과 맞선 후 해산했다. 또한 서울공대생과 교양과정부 학생 1천여 명은 7월 1일 교정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뛰쳐나와 경찰과 6차례나 충돌하면서 일부 학생은 학교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휘경동 육교 앞까지 진출했다.


서울문리대생 1백 50여명은 7월 2일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제 3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교문을 나서 3백 미터쯤 떨어진 이화동 로타리까지 진출하여 서울법대생 2백여 명과 합세했다. 학생들은 ‘3선반대’ ‘독재타도’등을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뚦으려했지만 경찰이 쏘아대는 페퍼포 그에 밀려 법대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서울대 상대상 1백 50여명은 7월 3일 교내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연후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맞서다가 학교 안으로 밀려가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다 해산했다. 이날 서울대 사대생 2백여 명도 3선 개헌 반대데모를 별여 성동소방서 앞까지 진출한 후 경찰의 제지를 받고 거리에서 농성을 벌이다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대 약대생 1백50여 명도 이날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가졌다.


위대한 반항은 위대한 전지을 잉태한다

7월 4일은 서울대생들이 데모의 절정을 이루며 1학기 투쟁을 마감하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서울상대생 1백50여 명은 교문을 나와 고대생 4백여 명과 합해 안암동 로타리까지 진출했다. 서울상대와 고대생들의 연합 데모는 서울상대의 후진국사회연구회와 고대의 한사연 소속 학생들이 미리 보조를 맞추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서울대 의대생 2백여 명은 이날 강의실에서 3선개헌을 성토했으나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했다. 서울대 치대생 1백여 명은 3선개헌을 성토한 후 교문 밖으로 나서다가 경찰의 제지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동숭로를 사이에 두고 문리대 및 법대와 마주 보고 있었지만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던 의대와 치대생들까지 흰 가운을 벗어던지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권력을 향해 울분을 쏟아냈다.


서울공대생과 교양과정부 학생 6백여 명도 이날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연후 교문 밖으로 나가 학교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중량교까지 지ㅣ?출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때 경찰은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서울대는 7월 5일 “사정에 의해 임시휴교한다”는 공고를 붙였다. 학교 당국은 데모를 주동한 학생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여름방학 중에 협의하여 5개 단과대에서 자퇴 7명, 무기정학12명, 유기정학 2명 등 21명을 처벌했다.


고려대생들도 7월 중순과 하순에 3선개헌 반대데모를 집중적으로 벌였다. 고려대생들의 데모의 특징은 서울대와는 달리 주로 1천 명 이상의 대규모로 장시간, 그리고 격렬하게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생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고려대 당국은 7월 28일 퇴학 1명, 무기정학 11명, 기타 4명등 16명을 처벌했다. 처벌된 학생은 퇴학에 조춘구(경제학과4·전 총학생회장), 무기정학에 이원보(경제학과4), 이상수(법학과3), 윤준하(정외과 3), 유기정학에 선병덕(행정학과 4), 김민환(신방과 4), 이관영(정외과 3), 곽승진(정외과 3), 함상근(법학과 2), 김종필(경제학과 2) 등이며, 재입학 불허는 이문수(철학과 3) 등이다.


연세대생 6백여 명은 6월 20일 오전 11시 언더우드 박사 동상 앞에 모여 3선개헌 반대와 대학에서의 정보사찰 중지를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범연세호헌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열린 이날 대회는 “법과 정치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효율성이란 미명 하에 조작된 개헌작업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이날 “위대한 반항은 위다한 참여, 위대한 참여는 위대한 전진을 잉태할 것”을 강조하는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채택했다.


연세대생 1천 6백 명은 6월 30일 노천강당에서 3선개헌 성토대회를 갖고 “3선개헌으로 인해 또 한번 민주주의가 수난을 당하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호소하고 가두데모를 벌였다. 


또한 연세대생들은 7월 1일 3선개헌 반대 등을 외치며 교문을 나서 이화여대 정문 앞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연세대 의대생과 간호대생들도 7월 3일 3선개헌을 반대하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연세대의 일부 학생은 이날 게릴라적 방법으로 시내로 진출하여 중구 정동 문화방송 앞에서 언론의 각성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3선개헌 추진 선언

 연세대생 2천여 명은 7월 7일 오전 11시부터 가두데모에 돌입했다. 이 가운데 상경대생 7백명은 아현고가도로까지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제지로 해산됐다. 일부 학생은 신촌역사를 사이에 두고 페퍼포그를 쏘아대는 경찰에 투석전으로 격렬하게 맞섰다.


서강대생 3백여 명도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세 차례 3선개헌 반대 가두데모를 벌였다. 이들은 교문을 나서 신촌로터리를 거쳐 이대 입구까지 진출하여 일부는 연세대 데모대와 합세하기도 했다. 


이밖에 성균관대, 경희대, 한국외대, 부산대, 경북대 등 전국의 주요 대학생들도 1969년 1학기에 3선개헌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박정희는 대학생들이 여름방학으로 들어간 7월 25일 갑자기 특별담화란 것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공식선언이었다. 박정희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 야당은 바쁜 전 국무위원을 국회에 출석시켜 매일 개헌문제를 가지고 따지고 야당 당수는 규탄형식의 공개서한을 나에게 보내 개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으며, 전국적 유세에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 개헌 발의권조차 없는 대통령에게 개헌 포기를 강요하는 야당의 정략은 앞으로 남은 나의 임기 2년이 정국을 혼미와 암담으로 몰아갈 것이다.


○ 정부가 정말로 무능하고 실수가 많아서 국가가 망할 지경이라면 이 정부는 즉각 물러나야 마땅하다.


○ 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때에는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한다.


○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때에는 나와 정부는 불신임 받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물러선다.


○ 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 주기 바란다.


○ 야당은 합법적으로 반대투쟁을 벌이기 바란다.


박정희의 이같은 담화는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자신에 대한 신임 여부와 연계시키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국민을 협박하여 국민투표로 승부를 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이 담화는 야당에 대해 합법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헌반대 투쟁을 강력히 단속하겠다는 저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더욱 격렬해진 3선개헌 반대투쟁

 대학생들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1969년 2학기에는 더욱 격렬하게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서울문리대생 1백여 명은 9월 1일 오전 10시쯤 교정에 모여 비상시국선언문과 전국대학교수단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한 후 성토대회를 갖고 ‘3선개헌 결사반대’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법대 부근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법대 구내를 통해 문리대로 되돌아갔다. 이 가운데 50여 명은 강당 옥상에 설치한 확성기로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밤샘농성을 했다.


서울법대생 40여 명은 9월 1일 오전 11시 법대 도서관 참고도서 열람실에서 단식선언문을 발표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반개헌, 독재’라는 플래카드를 도서관 밖에 내걸고 옥상에 가설한 마이크로 학교 밖 행인들에게 3선개헌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전했다. 한 학생은 도서관에서 농성에 참여한 동기에 대해 “헌정을 유린하는 독재정권 아래서 법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서울상대생 2백여 명은 9월 1일 오전 11시쯤 강당에서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오후 4시까지 교문 밖으로 50여 미터 진출하는 등 7차례의 가두데모를 벌였다. 이들 중 1백여 명은 교내에서 밤샘농성을 벌였다.


서울대 교양과정부 문과학생 2백여 명은 9월 2일 연기되어 실시하려던 1학기말 시험을 거부하고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이들은 ‘3선개헌 반대’란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한독약품 부근까지 진출했지만 교수들의 만류로 오후 2시쯤 학교로 돌아갔다.


서울사대생 1백여 명은 9월 3일 오전 교수회의실에서 개헌 학술세미나를 열고 헌정수호를 위한 학생결의를 천명했다. 이 가운데 40여 명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가진 후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돈 후 해산했다.


서울공대생 2백여 명은 9월 4일 오전 9시 지난 학기에 치르지 못하여 실시하던 1학기말 시험을 거부하고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을 나와 한독약품까지 진출했으나 교수들의 만류로 학교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서울대학교는 단과대 별로 휴강에 들어가 학사행정이 마비됐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는 9월 20일 임시 학장회의를 갖고 23일 개강하기로 결정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2천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9월 3일 오전 노천강당에서 세차게 뿌리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은 채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조국의 민주수호와 학원의 자유수호를 위해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이 가운데 7백여 명은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해산했다.


연세대생들은 9월 4일에도 노천강당에서 3선개헌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가젠 데 이어 9월 5일에는 가두데모를 벌여 일부 학생이 이화여대 입구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부활을 염원하며

 성균관대생 7백여 명은 총학생회 주최로 9월 4일 오전 11시 문과대학 앞 분수대 부근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배달겨레의 비극적인 역사를 재반복하려는 기성 정치인의 비양심적이고 비민주적인 3선개헌을 방관할 수 없어 투쟁의 기치를 올린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학생들은 곧 교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문 밖 30미터까지 진출했지만 기동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밀려 학교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시 전열을 정비한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를 뚫고 혜화동 로타리 부근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은 학생 11명을 연행했다.


또한 성균관대생 80명은 9월 8일 오후 2시 법정대 중강당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가진 후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결의문에서 “지난 4일 데모 때 법학과 2년 김일수 군의 영장 없는 구속을 즉시 철회하라”“민주주의의 왜곡된 어용단체의 망동을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한다”는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이들은 11일 오후 2시 교수들의 간곡한 만류로 72시간 만에 농성을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9월 10일 오후 1시 운동장에서 3천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개헌반대 성토대회를 가졌다. 학생 대표는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민주주의의 부활을 표명하기 위해 흰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착용하여 3선개헌에 대한 확고한 반대의사를 다짐한다”고 목메인 소리로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대생들은 이 결의를 한 후 9월 13일 현재 학생의 80%가량이 흰 블라우스에 검정 스커트를 입음으로써 3선개헌을 분명하게 반대했다. 최영희(사회학과 1)는 “사회학과 1학년 40명 중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학생이 1명 있었는데 그는 쑥쓰러웠는지 그 날로 흰 블라우스를 사서 바꿔 입었다”고 학생들의 단결력을 설명했다.


또한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9월 12일 정오에 열린 대강당 채플 후 3천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구국기도회를 갖고 정치인들의 맹성을 촉구했다.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는 대신 기도로써 우리의 의사를 관철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남대 법대생과 문리대생 3백여 명은 9월 11일 상대 앞 노천광장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했다. 전남대 의대생 3백여 명은 9월 12일 오후 1시 30분 강당에서 3선개헌 반대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으나 5시간 만에 교수들의 만류로 농성을 풀었다.


야도적(夜盜的) 수법으로 개헌안은 통과되고

 그러나 박정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동원하여 9월 14일 새벽 2시 53분 국회 제3별관에서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3선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개정된 헌법의 핵심은 제69조 3항에“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는 것이었다. 표결 결과는 재석 1백22명중 가 1백22표로서 재적 의원 3분의 2에서 6표를 넘는 것이었다. 여당 의원들은 이와 함께 국민투표법안도 내무위원회의 수정안대로 통과시켰다. 


신민당 의원들은 여당이 야도적(夜盜的) 수법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격분하여 김상현, 최형우 의원 등을 선두로 제3별관에 진입하여 투표함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신민당 의원들은 의장실과 의장공관의 가구와 집기를 이틀에 걸쳐 파괴했다.


공화당 정부는 10월 17일에 국민투표를 시행한다고 10월 8일에 공고했다. 공화당을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훈련된 핵심요원 8천여 명을 전국의 읍·면 단위까지 파견하여 개헌안이 통과되어야만 국가가 번영할수 있으며, 만에 하나라도 통과되지 못하면 일대 혼란과 파멸이 있을 것이라고 국민을 위협했다. 공화당은 방대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동원하여“안정이냐 혼란이냐를 택일하자”는 구호를 내세우며 대세를 천성 쪽으로 몰아갔다.


국민투표 결과는 총투표자 1천1백60만4천38명중 찬성 7백55만3천6백55표, 반대 3백63만6천3백69표, 무효 41만4천14표였다. 


이로써 1년 동안 수업을 제쳐놓고 3선개헌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대학생들은 반동적인 권력의 횡포 앞에서 양심과 정의가 짓밟히는 아픔을 되새겨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생들에게 반독재 투쟁의 당위성을 더욱 강화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서울법대 학생 2백여 명은 1969년 11월 6일 낮 12시 30분 합동강의실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학생총회를 열고 학생총회 소집 이유서, 신체 및 언론의 자유를 위한 선언, 개헌과 우리의 입장 등 3종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학생들은 개헌과 우리의 입장이란 글에서 “이번 개헌 통과야말로 비민주적 세력의 추악한 승리였으며, 그 처리 과정은 이들의 본체와 수법을 선명히 드러낸 역사적 시험대였다”고 규정하고 “어찌하여 조국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 빠져들어 가고 말았는가?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열망을 집결하고 대변하여 부패와 독재에 과감히 투쟁할 민주세력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괴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궁극적인 투쟁이 패배한 것도 아니며 끝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투쟁은 강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투쟁이야말로 역사의 진보를 위한 투쟁이며 국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라고 꺾이지 않는 의지를 과시했다.


2) 민중문제에 관심을 집중

 민중은 역사의 원동력이다. 민중사관(民衆史觀)은 이러한 명제를 근간으로 성립된다. 고대로부터 중세, 그리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배자들의 폭압으로 억눌리고 착취당해온 민중, 아니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소외되고 백안시당하는 민중이 역사를 밑으로부터 받치고 있으며 국민주권의 원리의 주인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다.


더구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저임금으로 혹사한 노동자·농민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다시 말하면 노동자·농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내서 수출위주의 고도경제성장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므로 1970년대에 피폐한 농촌을 떠난 민중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여 극심한 빈부의 격차 속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투시하던 대학생들은 그가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대학이라도 입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행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의 가난한 이웃은 처음부터 대학의 문을 두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입에 풀칠을 하기에도 벅찼다. 그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하나둘 쓰러져 갔다. 이러한 사실을 그들은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서울법대생 50여 명은 1969년 12월 4일 오후 제8강의실에서 서울법대학생 민권기구 발기식을 가졌다. 이날 학생들은 “사회문제를 현실적, 체계적으로 연구 비판하며 민권 신장을 위해 그들의 민권의식을 계몽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법대 안에 민권상담소를, 빈민지역에 공민학교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 기구의 창설을 주도한 장기표는 “민권기구는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들의 민주의식을 확고히 구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시도된 학생운동의 새로운 동향”이라고 설명한다.


도시빈민·노동자·농민들을 찾아서

 한편 성루대 후진국사회연구회원들은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피땀을 담보로 하여 추진되는 고도경제성장 정책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1970년 5월 25일부터 6월 10일까지 빈민촌(서울시 북가좌동·용두동·연희동, 경기도 광주군 탄리·단대리)을 설문지로 조사했다. 학생들은 8명을 한 조로 하여 5개조를 동원했으며, 낮에 노동하러 나가는 가주주와 면접조사를 하기 위해 용두동 지역에서는 판자촌에 셋방을 얻어 숙식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또 여름방학 중에 농촌(전라남도 나주군 공산면)의 실태를 같은 방법으로 조사했다.


그들은 그 결과를 종합하여“서울시 판자촌의 형성과 이농현상”이란 보고서를 작성하여 문리대 교지 ≪형성≫여름호에 실으려 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이 글을 삭제하고 발행할 것을 요구하여 교지 발간일이 늦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소동으로 후진국사회연구회는 원고를 ≪형성≫에 싣는 대신 21쪽짜리 프린트판 별책으로 발행했다.


다만 후진국사회연구회는 1971년 6월 20일에 발행된 서울상대 교지 ≪상대평론≫제31호에 “서울시 빈민촌 실태조사ㅡ이농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보고서 전문을 게재할 수 있었다. 이 글이 ≪상대평론≫에 게재될 수 있었던 것은 후진국사회연구회 출신으로 상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김상곤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형성≫에서 삭제된 “서울의 의미”란 장을 이곳에는 수록했다.


후진국사회연구회원 이대용(서울대 경제학과) 은 1969년 겨울방학 때 안동댐 수몰민 실태조사에 나선 데 이어 농촌봉사활동에 자주 참석했다. 그는 1972년 여름방학 때 강원도 화천 지방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학생들 사이에 사소한 문제로 다툼이 있자 그는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에게 기합을 주고 나도 기합을 받아 서로 울면서 일체감을 형성할수 있었다”면서 민중과 함께 낮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유의 종 동인회가 발행한 ≪자유의 종≫은 1970년 11월 12일에 발행한 제5호에서 판자촌 철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기사는 “6일 오후 1시쯤 서울 영등포구 사당동 산 22 국유지 및 사유지에 들어선 무허가 판자집을 철거하러 나섰던 영등포구청 철거반원 1백여 명과 기동경찰 80명이 주민 1천여 명과 충돌, 주민은 투석으로 경찰은 20발의 최루탄을 쏘는 등 3시간 동안 큰 소란을 벌였다. 이 충돌로 6명이 부상했다(11월 7일자 ≪조선일보≫)”는 보도를 인용한 후 “이러한 충돌사건은 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왜곡된 근대화정책이 빚어내는 모순의 구체적 표현이 아닐까. 철거민들의 투석은 생존의 마지막 몸부림이다”라고 논평했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그러나 민중을 향한 대학생들의 의식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평화시장 앞길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스스로 불태워 숨진 사건이었다.


전태일의 의로운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밀물처럼 청계천변 평화·동화·통일시장으로 몰려들어 전태일의 비극을 잉태한 영세 피복공장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닭장과도 같은 다락방에서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쭈그리고 중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목격한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다.


서울법대생 장기표는 이 때 달려가 만난 전태일의 유족들과 일생을 동고동락하는 인연으로 결합한다. 그는 전태일 일대기를 쓰기 위해 수집한 귀중한 자료들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힌 서울법대 동료 조영래에게 넘겼다.


조영래는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이후 수배중일 때 혼신의 힘을 다해 불후의 명저 ≪전태일 평전≫을 썼다. 이 책은 조영래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돌베개출판사에서 1983년에 초판을 찍음으로써 세상에 소개됐다. 조영래는 1993년 지병으로 숨졌다. 그가 작고한 후에야 이 책의 저자가 조영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인은 이처럼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명성을 뒤로 한 채 스스로 썩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밀알의 역할을 자처했다.


서울상대생 4백여 명은 1970년 11월 18일 오전 11시 강의실에서 학생총회를 갖고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한 후 근로조건의 개선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걸고 48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11월 23일 오후 1시 학생휴게실에서 다시 학생총회를 열고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를 듣고 이 가운데 50여 명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문리대생 2백여 명은 11월 20일 오전 11시 노동자탄압을 성토하는 모임을 갖고 “전태일씨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근로자의 노동조건을 즉각 개선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서울법대생 2백여 명은 11월 20일 정오 교정에서 고 전태일의 영정을 안치하고‘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추도식을 거행했다. 학생들은 추도식을 끝낸 다음 가두데모를 벌이려 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교문을 나서지 못하고 학교 안에서 이튿날 오후 7시까지 단식농성을 벌였다.


고려대생 3백여 명은 11월 20일 교정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고 국민권리선언을 낭독했다. 


연세대생 50여 명도 같은 날 오전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갖고 “3백만 근로자의 스승 고 전태일님의 분신자살에 즈음한 우리의 외침”이란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들은 이 글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적 생존권 보장, 계층적 경제질서의 타파, 소득 재분배의 불균형 시정, 매판 정치업자의 의식 개조 등을 주장했다.


한국외대생 1백여 명도 같은 날 운동장에 모여 전태일 추모 모임을 갖고 “우리는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면서 전태일의 죽음과 학생운동의 관계를 거론했다. 학생들은 “학생운동이 노동자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입장에서 투쟁해야 할 것”이라는 데 견해를 함께 했다.


전국의 대학을 흐느끼게 한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밖에 전국의 많은 대학교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양심에 불을 질러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학기말 시험으로 2학기를 마감할 시점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전국의 대학을 조용히 흐느끼게 했다.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숨짐으로써 같은 연배의 대학생들에게 이토록 강한 충격과 동기 부여를 한 예는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민중에 터를 둔 학생운동의 노선을 정립했다. 전태일 사건은 정치지향적 이슈에 치중해온 종래의 학생운동에 맹성을 촉구하면서 학생운동사에 있어서 정치적 이슈와 민중적 이슈를 결합시키는 동인(動因)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 노동자의 죽음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갑자기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1970년 12월 21일 오후 8시쯤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은 데 분개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평화·동화·통일상가의 노동자 등 50여 명은 “전원 제2, 제3의 전태일 선생이 되자”고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가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기동경찰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22일 오전 11시쯤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서울상대생들은 이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후 23일 오후 호소문을 발표하고 “나이 어린 소년소녀들이 기업주들이 강요하는 잠 안오는 약을 먹고 돌팔이 의사에게 각성제 주사를 맞으며 철야작업을 하고 있다”고 폭로하고“전태일 선생의 동료와 심지어는 단지 장례식에 참석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죄없는 근로자를 해고 조치하는 악질적이라기보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기업주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대학생들은 영세상인들의 조세저항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1971년 8월 31일 평화·동화·통일상가 상인 1천여 명은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 공세를 견딜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철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자유의 종≫은 9월 9일에 발행한 제 28호에서 “과중과세의 반민족성을 규탄한다”는 글을통해 “영세 상인들에 대한 과중과세는 기업을 도산에 이르게 하여 대량실직을 가져올 것이며 도산까지는 안 간다 하더라도 기업의 약화와 영업 의욕의 저하를 가져와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및 근로조건 새건을 저하하게 되어 결국 과중과세는 근로자들의 권익에 큰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이 글은 “외국자본에 대해서는 온갖 특혜에다 감세까지 해주면서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가혹한 과세를 부과한다는 것은 민족자본의 수탈로 외국자본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사례품으로 정권연장이나 해보겠다는 것은 반민족적 반민주적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3) 선거 참관 및 부정선거 규탄

 선거 참관 및 부정선거 규탄데모는 13개 대학생 대표들로 이루어진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위원장 심재권 · 서울대 상대 3)을 주축으로 전개됐다. 대규모의 선거참관은 학생운동의 민주적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으며, 부정선거 규탄데모는 정치 현장의 부정을 시정하려는 몸부림을 강하게 표출했다. 여기에 각 대학 학생회와 서클 대표들이 동참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연맹은 1971년 4월 19일 ‘민주수호 대행진 선언’을 발표하고 전국 규모의 항거를 호소했다.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문헌으로 꼽히는 이 선언은 “한계를 넘어서 확대된 부패와 특권에 따라 전국민은 군대조직으로 재편성되었고, 전학원은 병영화 일보 전에 와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이제 10년간의 폭압을 ENfg고 자유와 생존을 위한 전민중의 열화 같은 의지는불타오르기 시작했다”고 지적하고 그 증거로서 지도적 지식인들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깃발아래 뭉친점, 유수한 언론인들이 언론자유를 탈환할 것을 선언한점, 종교인들이 유린된 민권과 뻬앗긴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권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 점 등을 들었다.


이어서 이 선언은 집권자에 대한 요구, 우리의 행동지침 등 구체적인 지적과 대안을 포함하고있다. 


학생들은 집권자에 대해 1)원천적인 부정선거를 즉각 중지하라 2) 언론탄압, 학원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3) 민족 단합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인 특권을 추방하고 소문난 거물급 부정부패분자들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행동지침으로 1) 선거는 몇 개 정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민의 선거인 만큼 그 공정성의 보장이 어느 때보다도 위협받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민주선거를 진취하기위한 운동에 나선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참관운동을 전개하여 투표소와 개표소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 2) 위에 밝힌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전국의 모든 학생은 20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일대 항의시위를 벌인다 3)휴교조치가 취해지면 일제히 지방으로 내려가서 공명선거를 위한 선전대, 감시대로서 활동한다 4) 4월29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전학생은 각대학에 동맹등교하여 선거 양상에 관하여 의견을 종합하고 그에 따른 행동방침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이 선언은 교련반대 데모의 연장선상에서 당면한 4월 27일 대통령선거를 겨냥하여 선거참관운동을 병행알 것을 제시하는 등 기동성을 띤 전략을 함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정선거 감시 위한 선거참관운동 전개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주도한 학생들은 4·27 대통령선거와 5·15 총선거에 즈음하여 선거 참관운동을 전개화는 문제를 은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파괴력을 우려한 서울대 당국은 4월 중순‘당부의 말’을 통해“분교부에서 대학생들의 투·개표 참관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교육적인 견지에서는 우선 학생들의 기본 임무인 연구와 수강에 지장을 초래하고 과열된 정치 분위기가 학원으로 유입되어 학원의 안정을 저해하고 자칫하면 학생사회의 분열을 가져와 명랑해야 할 캠퍼스 분위기를 파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 결과 교육과 연구라는 대학의 기본 기능에 적지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 예상되므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본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대학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될 때 교육과 연구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다. 이것을 감시하겠다는 대학생들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바탕 위에서 교육과 연구에 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 곳에서는 대학이 존립할 여지가 없다는 인실을 가진 대학생들이 잠시 수강을 미루고 선거현장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당연한 자세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총학생회는 4월 22일 오전 11시 30분 교수회관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최근 일부 인사들이 순수한 학생운동을 야당이나 북괴의 조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학생들의 순수성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대표 심재권은 기자들에게“4·27선거가 공명선거가 되도록 선거참관운동에 들어가기 위해 신청해오는 학생들을 접수하여 참관인단을 결성하여 각지역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서울대 총대의원회는 4월 23일 성명서를 발표하고“선거가 종반전에 들어와 공명을 상실할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참관을 자원한 학생 6백30여 명을 전국 각 선거구에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은 4월 24일 선거참관인단 결성에 즈음한 선언문을 발표한 데 이어 이튼날 서울약대 교정에서 선거참관인단 결성식을 가지려 했으나 사복 형사 1백여 명과 학교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학교 밖에서 임시 결성식을 가졌다.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접전한 4·27 대통령선거전은 선거운동이 마감된 4월 26일까지 한치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각축전을 벌였다.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조직을 기반으로 표를 다졌으며,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40대의 패기와 선전을 무기로 표를 훑었다.


드디어 4월 27일 투표가 이루어지고 이날 밤부터 전국적으로 개표가 진행됐다. 개표 참관인으로 등록한 학생들은 각자의 소임에 따라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밤을 새웠다. 그러나 일부 학생은 선거참관을 방해받았다.


경북 달성군 현풍초등학교에서 선거참관을 하던 서울법대 김준년은 4월 27일 오후 3시쯤 현지 경찰에 연행되어 선거가 끝난 다음 풀려났다. 김준년은 “경찰은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에 투표율이 90%까지 올라가도록 주민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지시를 경비전화로 공공연히 주고받았다”고 ≪자유의 종≫에 폭로했다.


대학별로 개최된 선거참관 평가보고회

 이밖에 지방 경찰은 선거 당일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터미널에 사복 형사를 배치하여 선거에 참관하러 가는 학생들을 연행하거나 분산기키기도 했고 시외버스 노선을 임시로 차단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수십리를 걸어가게 함으로써 투표가 절반 이상 진행된 후 도착하도록 했다. 경찰은 EH 참관 학생들의 가족에게 연락하여 “퇴학시키겠다. 아버지 직업에 지장이 있다”.고 협박하거나 인상이 험하고 문신을 한 불량배들을 투표소 주변에 배회하도록 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했다.


4∽5일 동안 임무를 수행하고 대학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보고회를 가졌다. 


한국외국어대 학생 2백여 명은 4월 29일 오후 1시 교내에서 참관 보고회를 갖고 “이번 선거는 원천적, 지능적 부정선거였다”고 결론지었다. 


서울법대와 사생들은 4월30일 학교에서 선거참관 보고회를 갖고 “이번 선거가 투개표 과정의 부정보다는 공무원의 선거 관여, 방대한 자금의 살포 등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고 주장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지방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민주주의의 훈련을 쌓을 수 있는 지방자치제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서울 상대생 2백여 명도 같은 날 선거참관 보고회 겸 학생총회를 갖고“4·27선거는 부정선거였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선거참관을 한 고려대와 서강대생들도 4월 20일 대학별로 평가보고회를 가졌다. 이들은“이번 선거는 겉으로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같이 평온한 공명선거인 듯했으나 내면적으로는 행정력이 총동원된 고차원적이고 원천적인 부정선거”라고 통박했다.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대표들은 5월 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법대 도서관에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국 각지에서의 참관을 통해 선거과정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 4·27선거는 부정·불법선거였으며, 민주질서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와 민족 분열을 조장했고, 선거제도를 하나의 쇼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며,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영방송을 승리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이세계적 정치쇼에는 언론기관이 공범자로 가담했다”고 지적하고“양심적 언론인은 배수의 진으로 언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것과 야당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할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1) 전 국민은 비장한 각오로 단호히 항쟁하라! 이 기만적 협잡선거를 묵인하면 우리에게는 노예에의 길만이 남는다 2)우리는 주권 탈환을 위한 민주수호의 대열에 앞장서서 결연히 싸운다 3)이번 협잡선거를 공명선거인양 왜곡선전, 국내외를 기만한 언론이 엄중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신민당을 비롯한 모든 재야 정당은 4·27 무효화가 관철되지 않으면 국회의원 선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라는 등 4개 항을 결의했다


4·27 부정선거 규탄에 나선 대학가 

 선거참관 보고회를 통해 4·27선거를 부정·불법선거로 규정한 대학생들은 세를 모아 부정·불법선거 규탄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상대생 2백여 명은 5월 3일 오후 1시 학생회관 휴게실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교련철폐가 학원철혜냐”“민족분열을 획책한 자를 처단하라”고 성토했다. 학생들은 이어서 ‘원천적 부정선거 투표함’이라고 TMs 모의 투표함과 후보별 득표 표지판을 불살랐다. 학생들은 오후 2시 30분쯤 교문 밖으로 나서 고려대 앞까지 나아가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고려대 안으로 밀려들어가기도했다. 이날 서울상대 학생회는 “4·27선거는 타살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상대생 1백50여 명은 5월 4일에도 강의실에서 부정선거 규탄과 행동방향 설정을 위한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 가운데 50여 명은 정오 무렵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 밖 1백 미터까지 진출하여 거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밀려 1시간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서울상대생 1백 50여 명은 5월 3일 오후 1시 30분 합동강의실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4·27선거는 평온을 가장한 부정·불법 관권선거였고 전면적·원천적 부정선거였다”고 규탄하고 4·27선거 무효화를 선언했다. 50여 명의 학생은 총회를 마친 후 비를 맞으며 “4·27 부정선거 민주주의 통곡한다”,“위장된 평온속에 민주주의 죽어간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데모를 벌이다 학교로 돌아와 밤 8시에 해산했다


 또한 서울법대생들은 5월 5일 다시 열린 학생총회에서 ‘4·27부정선거 무효화’를 선언하고 “즉각 재선거를 실시하라”,“4·27일 무효화되지 않으면 야당은 5·25총선거를 거부하라”,“그렇제 않으면 야당이 독재에 협조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단죄할 것이다”라고 경고한후 도서관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가 7일 새벽에 해산했다.


서울문리대생 1백50여 명은 5월 5일 4·19혁명기념탑 앞에서 4·27선거 참관보고회를 갖고 “4·27선거는 무효다”라고 외치며 교정을 한바퀴 돈 후 해산했다. 문리대생들은 6일에도 학생총회를 갖고 “4·27선거의 무효화를 위해 구국대행진을 한다”고 선언했다. 학생들은 ‘통곡한다 남북분열, 저주한다 동서불열’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후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감리교신학대생 1백여 명도 5월 5일 오후 학생회관에서 4·27참관 보고회를 갖고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국민과 온 교회의 이름으로 전면 무효를 선언한다”고 말했다.


5월7일 오전10시에는 서울대 총학생회 주최로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생대생 등 3백여 명이4·19혁명기념탑 앞에 모여 4·27선거 규탄대회를 열고 ‘사이비 민주주의 화형식’을 가진 후 교문 밖으로 나가 대학로를 차단한 후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데모대를 해산기키기 위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마구쏘아대 대학로 일대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서울대생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다

 서울대생들의 4·27 부정선거 규탄과 5·25 총선거 보이코드 운동은 5월 11일 오전 11시 서울대 총학생회장단이 법대학생회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으로 대단원을 이루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27선거는 고도의 지능적인 조직적·원천적 부정선거로서 국민을 우롱했고, 선거제도는 집권층을 합리화시키는 요식절차로 전락했으며, 야당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현정권은 야당 파괴를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야당이 5·25총선거를 거부하고 계속 투쟁학지 않을 때는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대학생들의 선거참관을 주도한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은 5월 14일 오전 11시 서울문리대 학생 회의실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4·27 대통령선거는 정보정치와 폭력, 금력에 의한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무효다”라고 주장하고 “재야 정당은 5·25총선을 거부하고 민주수호 대열에 나서라. 정부는 청년학생연맹 간부 및 일반 학생들에 대한 불법연행 및 보복해위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서울대생 27명은 신민당이 4·27선거 후 부정선거에 대한 명확한 투쟁노선을 걷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5월 17일 정오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5·25총선의 거부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3시간 동안 신민당사에 머무르며 김홍일 당수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김당수가 부재중이어서 김의택 선거대책본부 차장을 만나 서울대 총학생회, 고려대 총학생회,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의 이름으로 된 결의문을 전달했다.


결의문은 “신민당은 5·25총선거를 즉각 거부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하려는 공화당정권의 광대놀음에 들러리 역할에 중지하라, 총선거를 거부하지 않으면 반민주·반민족 세력으로 규탄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서울대생들은 이상완(언어학과 3), 손호철(정치학과 2), 정찬혹(법학과 3), 우양구(행정과 2), 정계성(법학과 2), 정우량(국사학과 2), 김호경(정치학과 2), 한석태(정치학과 2), 이근성(동양사학과 2), 김경남(법학과 2) 등 10명이며 불구속 입건된 서울대생은 김문수(경영과 2)다.


이들이 구속되자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대의원회, 여학생회, 농성학생 총회는 5월 24일 선언문을 통해 민주학생 구속 말고 부정 부패자를 처단하라, 중앙정보부를 해체함으로써 폭력통치를 전면 폐기하라, 미국은 살인 가능한 데모 진압용 독가스의 공급을 즉각 중단하라는 등 4개항을 요구했다. 구속된 학생들은 6월 29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6부의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학생운동의 지평을 넓힌 선거참관 운동

 한편 선거참관으로 활동한 연세대생들은 5월 중순에 «연세춘추»의 주선으로 좌담회를 갖고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대학생 참관인단의 현지 파견은 정치 참여에 있어서 추상적이고 투쟁적인 방법을 지양한 구체적이며 조화적인 참여이며,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한 엘리트들의 평화적 시범케이스였다.”


 “대학생들의 선거참관은 민주헌정사상 4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행해진 순수한 선거참여 방식의 학생운동의 일환이었다. 이것은 학생운동의 발전적 방향을 암시한다. 이것을 또한 학생운동의 범사회화를 약속하는 징표가 될 수 있다.”


 “기관원등 기타 압력단체가 조성하는 공포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전에 철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어야 했다.”


4·27선거 참관인 등록을 한 최영희(이화여대 사회학과 3)는 경상남도 거창군을 지망했다. 그는 “투표가 진행중일 때 할머니 한 분이 투표통지표를 가지고 와서 ‘1번을 찍으라는데 어디가 1번이냐? 라고 물었다. 나는 느낌이 이상해서 투표를 중지시키고 투표소 안을 들여다보니 ’1번 박정희‘라고 적힌 명함 크기의 아트지가 놓여 있어 이를 집어 들고 ’부정선거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전한다.


최영희는 또 “나는 투표용지 수와 투표인 수가 16명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항의하자 여당측 참관인들이 내 멱살을 잡고 ‘쥐방울만한 계집애가 어른들한테 함부로 대들고 의심한다’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나는 ‘무슨 얼어 죽을 쥐방울이냐, 내 키를 봐라’ 하면서 호리호리한 몸매를 강조했다”고 말한다.


장하진(이화여대 사회학과 3)은 5월 10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생참관 보고회에서 “선거관리위원장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고 노골적으로 여당편에 서는 등 학생 참관인들이 보기에 한심했다”고 폭로했다.


요컨대 대학생들의 선거참과운동은 전국 조직을 가진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이 주도하고 각 대학 학생회와 서클 소속 학생들이 광범하게 참여하여 모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선거 부정과 부패를 감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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