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쿠바 기행] > 민주화운동 자료

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민주화운동 자료

자료실 > 민주화운동 자료

민주화운동 자료 목록

[손호철의 쿠바 기행]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45 조회85,922회 댓글7건

본문

1)피델의 도시, 혁명가 무덤엔 ‘FIDEL’ 다섯 글자만 쓰여 있었다

 

  

       

ㆍ산티아고데쿠바 “모든 개인숭배는 잊어라”

카스트로의 묘지 산티아고데쿠바에는 동상도 없고 묘비에 ‘피델’이라고만 써 놓은 카스트로의 묘지가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호세 마르티의 묘지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한 후 소위 ‘사회주의’ 국가는 이제 중국과 베트남, 북한, 쿠바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중 중국과 베트남은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를 적극 도입하고 있는 반면 쿠바는 북한과 함께 이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확히 60년 전인 1959 11.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역사적인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바혁명 60주년을 맞아 진보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쿠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고자 여정에 나섰다.

혁명이 시작된 동쪽 끝의 산티아고데쿠바를 출발, 피델이 반군활동을 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의 반군사령부를 거쳐 산타클라라 등 반군의 진격로를 따라 서쪽 끝에 있는 아바나까지 쿠바를 횡단하며 쿠바를 관찰했다.



<
대부>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작 중의 하나다. 3부작인 이 영화의 2부에는 1950년대의 아바나가 나온다. 당시 아바나는 마피아들이 장악하고 도박장, 매춘이 번성했던 ‘미국의 하수구’였다. 1958년 마지막 날 아바나에서 열린 마피아 두목 모임에 참석한 대부 알 파치노는 아버지(말런 브랜도)를 공격해 자신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대부의 길을 가게 만든 경쟁 마피아 두목을 처치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바나로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인 산타클라라의 반군을 진압하러 떠난 정예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티스타 대통령은 허겁지겁 망명을 떠난다. 혼란 속에서 알 파치노도 급히 미국으로 빠져나온다. 60년 전인 1959 11일의 풍경이다.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려라.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역사는 나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바나법대를 갓 졸업한 27살의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헌법을 정지시킨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1953 726일 동생 라울과 함께 10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 군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지리를 잘 모르는 아바나 출신의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면서 실패하고 만다. 많은 동지들이 사살됐지만 도주한 피델은 이틀 뒤 사살명령을 어긴 한 용기 있는 장교 덕분에 생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산티아고데쿠바로 향하는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3시에 호텔을 떠나 아바나 공항으로 향하면서 떠오른 것이 대학 시절 읽고 충격을 받은 피델의 이 유명한 최후변론이었다. 피델의 변론을 떠올리자 그와 나의 인연은 참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 봄 박정희와 김대중 간의 역사적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는 관권선거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참관인단을 조직했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생으로 운동권이었던 나 역시 이에 참가해 많은 부정선거를 목도했다. 그래서 참관인단의 대표로 야당인 신민당을 찾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부정선거 조사를 위해 국회의원 선거를 보이콧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우리가 야당 당사를 강제점거하고 선거 보이콧을 강압했다며 구속 기소했다. 당시 나는 최후진술에서 바로 이 피델의 최후진술을 써먹었다. “나는 3심 제도를 믿지 않습니다. 역사의 심판이라는 4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재판관 여러분들이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더라도, 역사의 심판은 무죄를 판결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2018, 나는 그를 만나러 산티아고데쿠바로 향했다. 쿠바 제2의 도시 산티아고데쿠바는 서북부에 위치한 아바나로부터 반대쪽인 동남쪽 끝에 위치해 800㎞가 떨어져 있다. 부산과 비슷하다. 피델은 이곳에서 가까운 시골에서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소년과 청소년기를 보내며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가 실패한 몬카다 공격으로 혁명을 시작한 곳도, 이후 게릴라전에서 승리하여 처음 해방시킨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한마디로, 산티아고데쿠바는 ‘피델의 도시’이다.

스페인이 식민지화한 뒤 사탕수수 농장으로 만든 쿠바의 초기 수도는 바로 이 산티아고데쿠바였다(이후 미국의 중요성 때문에 미국에 가까운 아바나로 수도를 옮겼다). 쿠바는 원주민이 대부분 학살과 질병으로 사라지고 노동력으로 아프리카 노예를 실어왔다. 이들의 대부분이 실려온 곳도, 이들을 통해 들어온 룸바가 라틴 음악인 탱고와 섞여 남미의 대표음악 살사로 탄생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역사적 중요성 못지않게 쿠바 음악의 중심지이고 가장 정열적인 도시인 만큼,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 직전에 쿠바항공기 추락사고가 터져 전원이 사망한 뒤 쿠바 정부가 미국의 경제제재로 낙후한 항공기들을 전면 정비하기 위해 모든 항공편을 취소하는 바람에 일정이 꼬여 머무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산티아고데쿠바 공항에 내리자 나를 제일 먼저 맞은 것은 “반군 도시 산티아고데쿠바” “영원히 영웅적으로”라고 쓴 커다란 벽 포스터였다. 역시 ‘반군의 수도’답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이 도시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세스페데스 광장. 구시가지는 산티아고데쿠바가 아바나보다 오래된 도시인 만큼 고풍스러운 스페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3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공산당사로 사용하는 건물로 바티스타가 미국으로 도주한 다음 날인 1959 12일 이곳에 진주한 피델은 이 건물 2층 발코니에 나와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첫 연설을 했다. “산티아고데쿠바의 주민, 그리고 쿠바의 모든 애국동포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산티아고데쿠바에 도착했습니다. 길은 힘들고 멀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해냈습니다.” 즉 혁명 실패 후 5년 반 만에 그는 승리하여 자신의 정신적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카스트로 ‘혁명의 시작점’이자

호세 마르티와 나란히 묻힌 곳


내가 산티아고데쿠바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광장이 아니라 피델의 묘지를 찾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피델은 이곳이 사실상 자기가 유청년기를 보낸 고향인 데다 자신이 가장 존경한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관타나메라’는 그의 시로 만든 것이다)가 여기 묻혀 있어 아바나가 아니라 여기에 묻히고 싶어 했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 그가 묻힌 묘지로 이동하는데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혁명광장으로 피델이 최고지도자가 된 뒤 이곳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관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뾰쪽한 창을 여러 개 세워놓은 것 같은 광장의 조형물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장에 세워진 근사한 1950년대 미국 승용차 택시와 멀리 보이는 피델의 사진, 그리고 그 앞으로 지나가는 낡은 우마차의 대비였다. 그 대비는 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자주, 그리고 그 대가인 낙후와 가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여행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혁명광장 앞 풍경 산티아고데쿠바의 한 거리에서 만난 1950년대 생산된 근사한 미국산 자동차와 낡은 인력거, 카스트로 사진이 서로 대비를 이뤄 인상적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산타이피헤니아 공동묘지에 도착했지만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쿠바 청소년 스포츠 대표단이 참배를 와서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안내원이 공안에게 “멀리서 취재 온 외국 손님이니 사진만 찍고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 보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멀리서 보자니, 커다랗게 만들어놓은 호세 마르티의 묘지에 참배하는 선수단의 모습이 보였고 그 옆이 피델의 묘지라는데 묘지가 크지 않아 선수들에게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일정상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고 가이드는 오늘 중으로 피델과 게바라의 게릴라 본부였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으로 이동하려면 이곳 일정은 포기하고 이동하자고 독촉을 했다.

묘비엔 어떤 수식어도 없었다

그가 비록 장기집권을 했지만

혁명을 팔아 권력을 유지했던

‘속물혁명가’들이나

민의를 팔아 권력만 추구했던

‘속물정치인’들과는 다른

‘진정한 혁명가’였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쿠바의 여름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을 기다렸을까, 선수단이 호세 마르티 묘지 쪽으로 이동하고 피델의 묘지 쪽이 비었다. 몇몇 공안의 저지를 무시하고 무조건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그리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FIDEL.’ 그렇다. 바위에는 초록색 사각 구리판에 ‘FIDEL’이라는 다섯 자만이 쓰여 있었다. ‘쿠바혁명의 아버지’ ‘쿠바민중의 아버지’와 같은 흔한 수식어도 없는 데다가 ‘피델 카스트로’나 ‘카스트로’도 아니고 ‘피델’이라니!!!

한국인들이 쿠바를 찾지 않던 2000, 처음 쿠바에 왔을 때 충격을 받은 것은 어딜 가도 피델의 동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가 거대한 김일성 동상 등 북한의 개인숭배를 익히 봐온 만큼 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살아 있을 때이고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동상 하나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동상은커녕 성(카스트로)도 아니고 이름인 피델이라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지를 서울의 국립묘지가 아니라 광주나 목포에 만들고 돌 하나에 ‘고 김대중 대통령’도 아니고 ‘DJ’라고 써놓은 셈이다. 나는 내 묘비명으로 ‘호철’이라고 써놓을 수 있을까? 피델은 자신의 동상이나 관광상품을 만들지 말고,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나 광장, 연구소 등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는 30대에 혁명에 성공하여 50년이나 권력의 최정상에 머물렀던, 즉 현대 정치인 중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에 대해 장기집권을 터부시하는 자유민주주의적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나 역시 장기집권에 비판적이다. 장기집권하고도 타락하지 않을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은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2004 21세기 사회주의혁명의 주역이었던 차베스의 초청을 받고 베네수엘라를 다녀와 그의 뛰어난 지도력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가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했을 때는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피델의 묘비는 비록 장기집권을 했지만 그가 혁명을 팔아 권력을 유지했던 ‘속물혁명가’들이나 장기집권은 안 했는지 모르지만 민의를 팔아 권력만 추구했던 ‘속물정치인’들과는 다른 ‘진정한 혁명가’ ‘진정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도 모르게 그의 묘비 앞에서 묵념하며 말하게 됐다. “편안히 쉬시오. 피델!

손호철 | 서강대 명예교수

 

 

댓글목록

관보님의 댓글

관보 작성일

https://backlink-admin.com バックリンク 被リンク https://koreanzz.co.kr 백링크 https://backlink-admin.com https://ycfec.or.kr https://gamebee.co.kr https://toyhubh.cafe24.com https://toyhubh.cafe24.com https://toyhubh.cafe24.com https://gamebee.co.kr https://phonestar.org https://linktr.ee/3siavern94wv https://linktr.ee/futi_sedric https://linktr.ee/sjxxqa_538 https://linktr.ee/w4s0oa_992 https://linktr.ee/kyliebohay https://linktr.ee/kiniijah_tigran https://linktr.ee/dadxyray_lazar https://linktr.ee/kingdefid_tobby https://linktr.ee/mechestacey490 https://linktr.ee/backlinkkorea https://linktr.ee/3iym83gkjd7f https://directphone.co.kr

관세경찰님의 댓글

관세경찰 작성일

<a href="https://newsite.co.kr/" target="_blank">홈페이지제작</a>

복간님의 댓글

복간 작성일

<a href="https://koreanzz.co.kr" target="_blank">백링크</a>

창안님의 댓글

창안 작성일

<a href="http://xacarero.co.kr/" target="_blank">폰테크</a>

명년님의 댓글

명년 작성일

<a href="https://hdevent79.kr/" target="_blank">인터넷가입</a>

식열님의 댓글

식열 작성일

<a href="https://fnsfood.kr/" target="_blank">제주맛집</a>


사단법인 71동지회 | 대표자 : 김재홍 | 사업자번호 : | Tel : 02-730-4123 | Fax : 02-974-0071 | 주소 : 서울 노원구 중계3동 514-3번지 | E-mail : asp71@asp71.com
Copyright © 사단법인 71동지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