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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0년 전 그 날! 그리고 우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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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54 조회1,7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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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그 날! 그리고 우리의 미래!



김건만

 당시 연세대 정외과3년

 현재(주)칠원공조 대표이사 . 71 동지회 초대회장


1971년 10월 26일 오후 용산역 광장에 1차 강제 입영 대상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칠순에 가까운 노모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한숨만 쉬셨고, 그때는 그래도 낭만이 있어 박대선 연세대 총장 이하 많은 교직원들이 전송을 나왔고, 학생운동 하면서 청춘사업도 게을리 하지 않아, 여성동무가 2명이나 환송 나왔다. (6개월 후 고무신을 바꿔 신었지만) 그런 대로 분위기는 의기양양하였고, 그 후 이틀 간격으로 2차, 3차 징집되어온 ASP(전국 16개 대학) 논산 훈련소에서 3개 소대로 나뉘어 별도로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6주 동안 같이 먹고 자며 훈련을 받음으로써 우리들의 동지애는 싹트기 시작했고, 71동지회의 정체성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운동권 출신 대부분은 정보부나 보안부대에서 특별 배려하여 정보요원으로 활용한 전례가 많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예외 없이 전방으로 보내져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까지 1개 연대에 3~4 명씩 (대대별 1명씩) 중복없이 전진 배치되었다.


배출 때까진 무리 속에 끼어 서로 의지가 되었지만 보충대부터 101보, 103보로 나뉘면서, 사단, 연대로 갈라지며, 혼자서 다블빽을 매고 진중버스를 타고 내가 근무할 최종 부대로 갈 때 비로소 군대생활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배치된 곳은 21사단 63연대로 수색중대로 강원도 양구에서도 한참 북상하여, 비무장 지대 부근이었다.


그때만 해도 무학자도 군대를 가던 시절이라 고등학교만 나와도 거의 행정병으로 차출되는 판인데, 우리들은 대학출신 이었지만 모두가 말단소총수로 위에서 찍혀 내려 왔기 때문에 누구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참으로 청와대 빽으로 최전방 근무를 하게 되었으니, 명예로운 군복무의 시작이었고, 지금 까지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3년의 시간이었다.


1971년 12월 초 강원도 산바람은 유난히도 매서웠고 을씨년스러웠다. 산골짜기에 중대CP가 있었는데, 진중버스에서 내려 부대에 들어서니, 부대원들이 명찰도 없고 계급장도 없이 험악한 인상들을 하고 있어, 마치 산적소굴에 들어온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하였다. 저녁을 먹고 신고식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눈빛이 증오와 분노에 불타 있는 것을 느꼈다.


누가 그렇게 분위기 조성을 하였는지,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너 이놈, 부모 잘 만나서 팔자도 좋게 대학까지 들어가서, 배부르고 할 일 없으니까 교련 반대 데모나 해? 그래 우리는 배우지도 못하고 힘도 없어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데, 무식한 놈한테 혼 좀 나봐라!” 하는 적개심으로 무려 2시간 동안 구타와 기합으로 혼쭐을 내놓고 그들의 한풀이는 끝이 났다. 그 다음날 새별 6시 점호시간에 일어나야 하는데 배가 땡겨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일어나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는데 앞을 봐도 산이요 뒤를 봐도 산인데, 앞으로 이 애국가를 몇 번을 불러야 제대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앞이 캄캄하였다.


그때만 해도 토치카에 장작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이라 화목을 하고 생수를 밑에서 져서 날라오는 것이 쫄병들의 주 일과였고, 호롱불을 사용하여 매일같이 유리갓의 끄름을 닦아내야 하는데 닦을 때마다 손을 베이기 일쑤였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 전방에도 봄이 왔는데 진귀한 야생화, 온갖 나물들, 그리고 각종 열매들이(머루, 다래, 산딸기 등) 나의 얼어붙은 형이하학의 생활 속에 찌든 마음을 녹여 주었고 대자연의 소중함과 위대함 속에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어 주었으며, 고난 속에 희망이 공존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 당시 라디오에서는 가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여고시절’이 유행하였는데, 울려 내리는 그 노래 가락이 내 마음속에 애틋함을 더해 주었다.


수색 중대에서는 작전(주간 정찰/야간 매복)을 나가야 편하고 특식(고등어 통조림/라면)이 나오는데, 나는 도대체 작전에 끼어 주지를 않으니, 매일 작업만 하고, 라면 끓여 주는 것이 일과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안대에서 김건만이는 작전나가면 월북할지도 모르니까, 절대 내보내지 말라는 특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중대장 면담을 하고, 담당 보안부대원을 만나 끈질기게 설득시킨 결과 나는 부대 배치 후 6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DMZ작전에 참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처음 매복 작전을 나가는 날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칠흑 같은 밤이었는데, 나는 소대장 조에 편입되어 밤 10시경, 철책선을 통과하며 비무장지대에 들어섰는데, 10분도 안되어 대열을 잃어버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작전 완료 시간 전에 철책선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고, 앞으로 나가자니, 안전통로 외에는 전부 지뢰밭이라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척이나 긴 3시간 동안 지나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운동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1년 봄, 서울대 채만수 학형으로부터 연락이 와 무조건 관악산 모 지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가 보니 김근태(현 민주당 최고위원), 이신범(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등 기라성 같은 운동권 선배들이 먼저 나와 있었고, 요지는 그들이 지명수배되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전국 학생운동조직을 넘겨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흥진(고대), 최명의(서울법대), 이준형(성대) 동지와 함께 인수 인계를 받고, 바야흐로 고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해 10월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정보부 남산 분실로 끌려가 밤새껏 침대 마후라로 맞아 볼기짝이 터져 나가 그 다음날 팬티가 엉겨 붙어 용변도 보지 못했던 일! 그리고 보안대 서빙고 분실에서 매일 밤 간첩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불안 속에 떨었던 시간들! 그래도 그때의 고통의 별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이 위기를 잘 넘기면 남은 군복무도 아무리 힘들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 같았고, 사회에 나가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지옥같은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시꺼멓게 위장한 소대장의 얼굴이 나타났고, 내 몸은 굳어 있었는데, 3사 출신의 소대장은 의외로 반색을 하며 걱정말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월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군대 역할은 끝장 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덩치 큰 고문관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들(ASP) 모두는 1974年 가을에 모두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학교에 복교가 허락되었다.


그 후 우리들 중 많은 동지들이 투옥(최열, 선경식, 이태복, 김용석 등)되었고, 또 다시 학원으로부터 축출당했다. 나도 제적되어 유랑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내 사업을 시작(1983年)하였고, 그 바람에 친구들과 어울려 무교동 낙지집에서 막걸리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척박했던 시절, 그래도 최열 동지는 기독교회관 옆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 정부와 기업체들로부터 좌익세력으로 취급되어 핍박당하면서도 환경운동을 줄기차게 펼쳤으니, 그 저력이 최열을 오늘날 세계적인 환경 운동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 같다.


나는 1990년 초에 최열, 이준형, 손예철, 오흥진 회원과 함께 우리 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71동지회’란 명칭으로 정식 출범하였으며,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최열 동지(그 당시 총무)와 함께 1991年 20주년 기념 행사까지 치르며, 흩어졌던 동지들을 한 울타리 속에 모으는 역할만 했다.


이제 30주년 행사를 맞아 이윤선 회장(6代)이 10년 전보다 진일보하고, 달라진 ‘71동지회’의 모습을 잘 엮어 내리라 기대한다.


1971연부터 지금까지 30년간 우리 회원들을 만나며, 나는 세 가지 독특한 문화를 느끼곤 한다. 


첫째는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나간 군사정권(1961~1991)시절 한 명도 군부독재에 기생하여 권세를 누린 기회주의자가 없었으며, 아직까지 정치, 관, 언론 어느 분야든 부패에 연루되어 명예를 실추한 회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극히 민주적이며 우정어린 문화가 있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지역갈등이 있지만, 우리 회원간은 없으며, 대학차별도 없으며, 부귀를 논하지도 않으며, 정치적인 노선,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도 있지만, 한번도 자기 노선, 입장만을 내세워 대의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71동지회라는 우정의 용광로 속에 그런 소아적 사고와 편견은 녹아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셋재는 각 분야에 전문성과 프로 근성을 가진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개성들이 강하지만 소속집단 또는 분야에서 인정받고, TOP의 자리를 유지하거나 정상을 향해 계속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속한 모임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세 가지 독특한 문화가 계속 유지되길 바란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우리들이 모여 담소 할 수 있는 쉼터공간이 마련되고, 기금도 10억 이상 조성되어 연구재단도 만들어 올바른 대학교육과 시민운동에 관한 연구도 하고, 뜻 있는 일을 하는 후배들에게 후원과 격려금을 줄 수 있는 모임이 되었으면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가는 50주년 행사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후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는 ‘71동지회’가 되길 간절히 염원하며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71동지회원 선배님! 50주년 행사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후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는 ‘71동지회’가 되길 간절히 염원하며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71동지회는 선배님들의 이익과 권력 쟁취를 위한 이기적인 정치 집단이 아니었으며, 우리 운동권들이 오류를 범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모임도 아니었으며, 우리 선배들 대부분(특히 3金)이 그러했듯이 지나간 날 당신들이 한 행위가 항시 최고였고, 후배들의 역할을 가로막는 소아병적인 어리석은 집단이 아니었고, 미래 지향적이고 후배들을 아낄 줄 아는 집단이었기에 우리 모두 경외심을 표하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암울했던 시절,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시작된 이 모임이 고희가 될 때까지, 그 뜻을 간직하며 변함 없는 우정의 모임이 된데 대해 다시 한번 존경심을 표하는 바입니다. 끝으로 선배님, 모두 내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출처] 71동지회편, 나의 청춘 나의 조국, 71동지회 30년 기념문집, 서울: 나남출판, 2001, pp. 275~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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