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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군번 갖고 먼저 떠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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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54 조회1,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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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군번 갖고 먼저 떠나다니


 김대환

 당시 서울상대 경제 4년

 현재 인하대학교 교수


1971년 위수령으로 강제 징집되기 전에 내가 김성택 동지를 만난 적은 한두 번뿐이다. 언젠가 동문 사이인 최열 동지와 함께 서울 상대 캠퍼스를 온 적이 있고 문리대 근방에서 여럿이 같이 만난 것이 내 기억의 전부다. 따라서 김 동지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논산 훈련소 기간병이 있는 앞에서 김 동지가 나를 “형!” 으로 부르다 둘이 함께 기합을 받은 기억도 있다.


그러나 김 동지와 나의 진짜 ‘본격적인’ 인연은 군번줄로 맺어졌다고 할 수 있다. 훈련이 끝나고 ‘팔려가기’ 전에 군번표를 받게 되는데, 내 기억으로는 내가 김 동지보다 군번이 조금 빨랐다. 내 군번 차례에 내 대신 김 동지의 이름을 불러 김 동지가 군번표를 받았고 끝까지 내 이름은 부르지 않아 결국 나는 군번줄을 목에 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소 당황하여 있는데 김 동지가 다가와 군번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군번표를 보여주는데 보니,내 군번에 김 동지의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그냥 목에 걸어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팔려갔다. 눈물고개를 넘어 101보충대로.


이후 우리는 서로 연락 없이 군대생활을 보냈지만, 김 동지가 월남에 파병되었으리라는 짐작은 ‘군번 사건’을 통하여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군번 사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일 년이 훨씬 넘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내 몰골을 딱하게 여긴 은사 한 분이 나ㅔ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유력자에게 부탁을 한 결과 “그 군번은 월남에 가 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것이다. 아마, 그 때까지도 김 동지와 나의 군번과 이름은 서로 엇바뀌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제대 후 김 동지로부터 군대생활이 너무 따분하여 자원하여 월남전에 갔다왔다는 말을 직접 듣고 내 짐작이 맞았구나 생각하면서 그 ‘군번 사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다시, 훈련소시절 군번줄 얘기를 하면서 둘이 낄낄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지금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당시 우리의 소위 ‘ASP’ 신분은 유력자가 힘을 쓸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고 월남파병은 불가능하였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하여튼, 제대 후 김 동지와 나는 몇 차례 만나 소주잔을 나누었다. 교련을 인정받아 좀 일찍 제대했다는 김 동지의 말을, 교련을 반대한 우리로서는 치사한 짓이었다고 면박을 주고, 71동지회가 매가리가 빠졌는데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면박을 받기도 하고, 이러쿵저러쿵 시국얘기도 하고, 어떤 놈은 벌써 맛이 갔다는 둥 하면서 결국은, “에라, 술이나 마시자”였다. 


그러나 김동지와의 이러한 만남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고, 소식이 두절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수소문을 하니 성남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아는 것이었다. 연락해야지, 연락해야지 하는 사이에 해는 계속 넘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해 “김 교수, 절 기억하겠소?”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날아 들어왔다. 김 도이가 딱 집힌다. 급히 열어보니 과연 김성택 동지였다. “무슨 말씀을 고로콤 하시오”라는 회신을 보내며 만날 것을 청하였다. 몇 차례 연락 끝에 과천에서 만나기로 하고 달려갔는데, 그날따라 교통이 얼마나 막히던지! 중간중간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에이, 한 시간이“나 기다려보긴 처음이네” 하며 투덜대는 김 동지를 끌고 밥집으로 술집으로 다녔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닌다는 얘기에, 술은 참자고 했다가 면박을 당하고 난 다음이었다. 김 동지의 시국얘기, 아들 · 딸 얘기를 들으며 “너도 마시고 나도 마시자”로 거나하게 취했는데 김 동지가 불쑥 하는 말이, 과천에선 술맛이 나지 않으니 성남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었다. 거의 십 년 만에 만났으니 어떡해. 결국 차를 과천에 그냥 팽개치고 택시를 타고 성남으로 건너갔는데, 그 날 아니 그 이튿날 새벽까지 뭐가 어찌되었는지 아직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달 정도 지난 다음, 이번에는 내가 이메일을 보냈다. 어울리지 않게, “지난번 미안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시시한 소리 집어치우라며 또 만날 것을 약속했다. 아예 차를 집에 두고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분당으로 갔다. 여전히 모자를 쓴 김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 때문에 머리가 빠져 모자를 쓴다는 것이 지난번 만났을 때의 설명이었다. 만나자마나 다짜고짜 “가자!”면서 앞장 서 나를 끌고 갔다. 그리 크지 않은, 레스토랑이라기보다는 카페에 가까운 데에 도착해 앉아 있으니 뭔가 이상했다. 조금 있으니 술상이 차려지고, 그러고 나서야 김 동지가 자기 부인이란다. 그 동안 고생한 얘기, 경원대 근방에서 레스토랑을 하다 여기로 온 얘기, 여기 옮기면서 관공서와 다투었던 얘기, 어디 땅을 사놓은 얘기, 그리고 아들 · 딸 얘기… 듣고, 위로하고, 맞장구치고 하는 사이 양주 몇 병이 금방 비워졌다. 술을 더 내어 오려는 것을 내가 만류했다. 지난번 술을 그렇게 마시면서도 김 동지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일어서려는 참이었는데, 김 동지가 따라 나선다. 배웅하는 줄 알고 들어가라고 했더니, 김 동지 나름대로는 자기 가게라 불편해서 그런 줄 알고 다른 데 가서 한 잔 더 하잔다. 몇 차례 승강이를 벌였지만 이번에도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대신, 딱 한 잔만 더하고 다음으로 미루자는 다짐을 받고 전철을 타고 자리를 옮겨, 약속을 준수한 다음 다시 김 동지의 가게로 돌아와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김 동지가 잡아주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 찾기 쉬우니 언제든지 오소” 하는 김 동지의 말에, “그럼, 그럼, 알았어”라고 화답하고선.


나는 이것이 김 동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통원치료를 받는다고는 하나 김 동지는 예나 다름없이 씩씩했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술을 잘 마셨기 때문이었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니 책상 위에 팩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71동지회에서 보낸, 김 동지의 타계를 알리는 팩스였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서도 훑어보니, 발인이 벌써 지났다.


아, 김 동지! 이렇게 가다니. 내 군번을 목에 걸고 가더니 군번 순서를 쫓아, 나보다 먼저 떠나기요! 나랑 그렇게 술 마시고, 시국에 비분강개하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낙천적이더니. 동지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군번줄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장식하기 위해 나를 찾았던 것이오?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오. 내 군번만 목에 걸고 가지 않았더라도 나보다 먼저, 이렇게 훌쩍 우리를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김성택 동지!


 [출처] 71동지회편, 나의 청춘 나의 조국, 71동지회 30년 기념문집, 서울: 나남출판, 2001, pp. 28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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