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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의 악센트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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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54 조회24,068회 댓글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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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센트 포인트



 김재홍


 당시 서울 문리대 정치 3년

 현재 경기대 교수


6 · 25전쟁 직전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서 태어나, 출생의 시공(時空)부터가 천형(天刑)이었다. 시간적으로 민족상잔의 난리 통에는 갓난아기였으니 엄마가 더 고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내 고향‘남서부’는 일기예보 하는 기상청 정도나 과학적 근거를 갖고 언급했지, 정치(?)사회적으로는 삼청교육대의 목봉을 지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핸디캡이었음을 성인이 된 후에 깨달았다. 특히 정보수사기관원들이 태생 자체를 불령선인의 원죄로 보는 것을 알게 된 후 절망했었다.


71동지회를 만들어 준 1971년 10월 위수령 당시, 나는 서울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이 대학의 학생 자유신문 《議壇》의 공개된 발행인이었다. 공안당국은 이것을 지하신문이라고 했다. 동대문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이것 때문에 무지하게 얻어맞았다. 돈줄은 어디며 편집위원 명단을 대라고 하면서 두들겼다. 다행히도 돈줄은 그들이 눈독을 들이던 김대중 의원측이 아니었고 학생회비의 자율적 경비였음이 사실로 밝혀져 편집위원 이름을 감출 수가 있었다. 여기서 특종거리로 폭로하자면 당시 편집위원은 홍세화(외교학과 3년. 현재 프랑스 거주, 한겨레 칼럼니스트)임진택(외교학과 3년. 현재 판소리 연출가로 활약) 박홍석(국사학과 3년? 울트라 상임감사) 이동진(정치학과 3년. 현재 가야대 교수) 등 9명이었다.


군대 생활도 대승적으로 원만하게 소화하지 못했으며 계속되는 불만과 불안감 속에 시달리면 지내야 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때는 철책선 근무 중이었는데, 중대장 숙소에 불려가 시찰 나온 대대장과 함께 하루 종일 면담상태로 있으면서 아마도 군부대에선 드물게 합법적인 기권자가 됐음.


원래 1974년 8월 15일 저녁에 고향의 향토 예비사단 부대에서 제대하게 돼 있었으나 후배의 배려로 하루 전날인 14일 저녁 그리던 부모님의 계시던 집으로 갔다. 다음날 오전 10시, 아침상을 물리고 TV를 켰더니 광복절 기념식장이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우우 ~’소리와 함께 ‘쾅 쾅, 탕 탕!!’ 총소리가 터지는 것 아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설마 누가 대통령 박정희를 쏠 수 있으랴 싶어 TV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난 화면을 보니 독재자는 연단 뒤로 앉아버려 총알을 피했고 엉뚱한 퍼스트레이디가 들려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군 제대 후 가장 인상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다른 총탄이 터지고 그로 인한 후폭풍 때문인지 엄청난 시련 속에 빠져들었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일단 대학원에 진학한 후 다음해인 1987년 3월 시련 속에 빠져들었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일단 대학원에 진학한 후 다음해인 1978년 3월 동아일보 기자 공채로 숙명의 발을 디뎠지만 불과 3년차 때 다시 한번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렸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동아일보 기자일동 명의의 ‘4.17 자유언론 선언문’의 기초를 맡았고, 또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보도불가에 저항한 검열거부- 제작거부 주동자로 찍혀 전두환 노태우 내란지휘부에 의해 강제해직을 당했다.


내란 정권은 해직기자들에게 1년 반 동안은 아무것도 못하게 하다가, 극심한 탄압에는 결국 지하 반체제세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에 숨통을 터주는 차원에서 취직을 알선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나리오를 거부하고, 대신 해외유학을 타진하다가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 해 운 좋게도 서울대 대학신문이 무기정간인 상황에서 새 편집국장을 물색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적임자로 취직돼서 5년 반 동안 학교 안에 연구실로 겸용할 만한 근사한 집무실도 얻고 월급도 괜찮게 받으면서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87년 2월, “한국의 좌우익 이념과 해방후 정당활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서강대 이화여대 서울시립대 등에서 4년여 보따리 장사를 하며 대학 선생의 편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1987년 6월 시민항쟁 덕으로 정치적 자유화가 이루어지자 강제해직자들의 제자리 찾기 운동이 벌어져 대학교수의 길을 버렸다. 대학 교수로 서류를 다 갖추어 내고 약속도 받아 놓았으나 중도에 동아일보 기자로 복직했다.


복직해 보니 동아일보는 이미 입사 당시의1등 신문에서 2등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그동안 권력으로부터의 탄압으로 사세가 쇠진한 데다 내부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린 피해의식 때문인지 의식 있고 똑똑한 인재보다는 말이나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기자들을 주로 충원해 시간이 갈수록 회복할 기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복직 후 기자생활은 주로 정치부에서 통일부 외교부 국회 정당 국방부 군 등에 출입기자를 하면서, 80년 내란을 주도했던 정치장교 비밀사조직인 하나회를 파헤쳐서 관훈클럽의 1993년도 관훈언론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4월~95년 2월 동아일보에 매주 2회씩 ‘군-어제와 오늘’이라는 장기 시리즈를 연재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을 재정리해 《군1 - 정치장교와 폭탄주》 《군2 - 핵 개발 극비작전》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자, 4개월 만에 15만 부가 팔려 인세만 억대 이상을 받는 히트를 쳤다. 이 인세가 아니었던들 아파트를 늘려 현주소로 이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논술위원은 신문기자의 꽃이라 할 수도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으나 큰 오산이었다. 정치적 자유화가 진전되고 언론도 아무런 외부 견제와 장애 없이 무한경쟁 시대로 돌입하자, 이른바 마케팅 전략이라는 것이 신문사의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상황이었다. 마케팅 전략은 어떻게 하면 신문이 많이 팔리고 광고수주 경쟁에서 이기느냐를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수준 높은 기사와 정론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일반 상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과 똑같은 판촉전략이었다.


그런 판촉전략의 제1항은 소비자인 인구의 밀집지역이 어디인지, 제2항은 유효수요 즉 돈이 잘 도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살펴서 그 대상지역의 지역감정에 영합해서 신문을 제작하는 짓거리였다. 그것이 오늘의 동아일보 지면수준과 논조를 만들어 놓은 주범이었다.


논설위원 3년여 만에 청장년기를 몽땅 바친 동아일보에 이별장을 던지고 그래도 운이 있어선지 2001년 3월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통일안보대학원에 정교수로 영입됐다. 대학으로 옮겼지만 공백기를 허용하지 않고 언론계에서 칼럼기고와 방송출연 주문이 쇄도해 아직도 언론인인지 대학교수로 전업했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동아일보는 떠났으나 언론계를 버릴 수 없는 것 같다.


현재 YTN의 뉴스 대담프로인 ‘집중조명’의 앵커로 일주일에 2회 저오 출연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 ‘시평’의 칼럼니스트로 3주에 한 번씩 정치칼럼을 기고하고, MBC의 ‘미디어 비평’(매주 토요일 밤 9시 45분) 평가위원 등으로 보통 언론인 이상의 언론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대중적 방송해설가뿐 아니라 아카데믹 저널리즘을 병행해 나갈 생각이다.


독재권력이 무너지고 또 회사원으로서 짐이었던 상사와 회사방침이라는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난생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과 쓰고자 하는 글을 맘껏 쓰면서 평생 이대로 살아도 다른 욕심이 없는 요즈음이다.


 [출처] 71동지회편, 나의 청춘 나의 조국, 71동지회 30년 기념문집, 서울: 나남출판, 2001, pp. 28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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