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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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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55 조회3,31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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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중국



 남철희


 당시 중앙대 정외3년




 어지럽고 혼란스럽던 유신정권의 정치적인 상황 하에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의 길을 택한 지 35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처음 문구류 도매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소하고 단순한 제품도 수입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의무감으로 정외과 출신으로서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일본산 건축용 제도기를 국산화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초정밀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에 2년여간의 고생 중에 자금이 딸려 생전 처음 하루 10%짜리 속칭 딸라 이잣돈을 쓰면서까지 개발에 성공도 하였으나 이내 유사제품을 만드는 국내의 업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에 의해 이 아이템은 국산 개발에

 만 만족하여야 하였다.


이어 독일서 수입되던 청사진 복사기의 개발로 방향을 둘러 2년여 고생 끝에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기업화시키는데는 자본과 능력, 기초소재의 빈약함 및 후발업체들과의 경쟁 등과 시장의 한계성으로 기업화하지는 못하였다.


항상 국외로 마음을 두고 사업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중국과 인연이 되어 미래의 가능성이 큰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어 본격적인 수출입을 시작으로 중국사업을 한 지가 벌써 12년이 흘렀다.


중국으로의 수출은 순조로웠으나 애초에 믿지는 않았지만 대행을 시켰던 대기업의 직접거래 등 배신행위로 타격을 많이 보았다. 대기업들이 중소 업자들의 몸과 발로 뛴 노력의 대가를 땀 하나 흘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현실을 직접 겪어 보기도 하였다.


당시 농산물 등을 수입하였더라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농민 걱정까지 하는 사고의 사치로 진짜 돈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나 아니어도 이후 밀물처럼 대기업을 필두로 우리의 기술자에 의해 개량 개선된 엄청난 물량이 수입되어 농촌이 더 빨리 피폐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자기가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하는 것을 철저히 따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쫓겨다니다 보니 자연히 여러 가지 아이템을 알게 되었다. 동서남북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중국의 산업상황과 각 지역의 특산물 등을 섭렵하게 되었고 유통에 대해서도 눈이 뜨이게 되었다. 중국시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팔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혀 막막해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무역 쪽의 일을 하다 최근 2년 동안은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IT업계의 중국 진출을 돕는 중국전문가라는(?) 과찬의 대접으로 추천을 맏아 유명한 인터넷 회사와 중국업체와 합작도 성공시키고 또 몇몇 회사의 자문과 소프트웨어를 수출도 해주고 있다. 그런 중에 우리 한국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무지가 심각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 북쪽 흑룡강에서부터 남쪽의 심천 광주로 서쪽의 미얀마 국경까지 뛰어 다닌 12년 나의 경험도 혹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여 몇 자 적기로 하겠다. 


세계에서 자존심이 강한 민족중의 하나가 중국인이라고 누구나 알고있다. 표현을 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들의 자긍심은 정말 대단하다. 그것이 근세에 들어와 구미 열강과 일본에 무기력하게 침략을 당하여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입어 서방과의 문을 닫은 후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비효율성을 알고 경제적 개방정책을 취하면서도 결코 그들이 당한 그 수모를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돈은 받아들이면서도 수시로 그들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했던 그대로 중국에서 만주사변과 남경학살 등 뻔한 사실도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데 이러한 일에 중국인들은 대단히 분노하고 있다.


중국은 우리에게 같은 피부와 문화에서 오는 동질성 외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처음 중국에 갔을 때 그들의 호기심과 환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당서기, 시장 등의 면담이 줄줄이 이어졌고 국장급은 말석에 않는 그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자본의 도입 및 합작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며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 당시 기업체를 국영에서 떼어내어 일정액을 국가에 바치고 이익금은 기업 스스로 이윤을 나누어 갖는 그런 환상과 또한 말로만 들었지 시행해 보지 않은 이러한 자본주의식 개혁 개방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투자는 어떻게 하고 또 어떻게 운영해야 이익을 내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 허둥대고 있었다. 어떤 곳은 극진히 접대하면서 투자하지 않아도 좋으니 와서 운영만 해 달라는 회사도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국의 공직 사회는 후배가 선배의 자리를 넘어 진급하면 으레 옷을 벗는 것이 관례이나 이들은 등소평의 개혁 개방이후 사회적인 분위기가 늙은 사람보다 개혁 개방은 젊은이가 낫다고 하며 자리를 양보하고 뒤에서 열심히 돕고 있는 것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젊은이의 패기에 찬 추진력과 노인네의 지혜가 조화롭게 갈등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중국은 확실히 우리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산업의 질이 낮고 또 우리가 거쳐왔던 그러한 발전 모델을 본뜨고 있어서 우리의 중소기업들이 사업하기가 아주 좋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은 우리의 산업 발전을 벤치마킹하고 있으므로 그 과정을 지나 열심히 선진국에서 배워 더 나은 기술로 이전해, 필요가 없는 기계 및 장비를 가지고 가서 사업을 하면 적은 돈을 투자하면서도 기업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경제기적을 이루어내면서, 몸으로 때우며 습득한 아직도 녹슬지 않은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으로, 중국에서는 우리 역시 조작법을 제대로 몰라 100% 활용 못하는 비싼 자동화 기계의 투자보다는 이러한 유휴장비를 가지고, 면밀한 시장조사와 파트너만 잘 만나면 중국의 소비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고 확신한다.


내가 중국을 다닌 지 몇 년이 지난 후 양국간의 국교 성립 후 밀어닥친 중국바람에 너도나도 중국시장에 대한 사전 준비도 없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론 그 당시 투자한 기업 중에 성공한 기업이 몇 군데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심지어 대기업조차 초기에 투자했다 실패한 사례와 심지어 합작 계약서를 작성하고 합작승인이 났으나 공장가동도 못한 채 5년이 지나도록 기계의 포장조차 뜯지 않고 있는 참담한 현실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 대부분의 실패는 중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상대에 대한 충분한 조사 없이(물론 그 당시 중국에 대한 국내의 자료는 거의 없었던 걸로 알지만)막연히 잘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중국내의 시장의 폐쇄성에다 상대 파트너의 무능력과 사회주의 체제에 사고와 행동이 굳어 있는 그들의 노동 생산성과 철밥통의 오랜 관습 등을 보지 못하고 사업을 시작한 상태에서 실패는 예정된 일이었다.


또한 중국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문제이다. 그들이 모른다고 고물덩어리 기계를 들여오거나 기계를 과다 계산하여 속이고 들어온 경우는 거의 다 날린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믿다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의 보복은 철저하다.


내가 소개한 어떤 접착제 회사 사장은 내가 그렇게 솔직하게 양심적으로 속이지 마라고 얘기했으나 중국에는 이런 기계가 없다고 걱정 말라고 하다가 중국 파트너가 미리 알고 합작 기간이 15년인데 당신이 나를 속이는 것은 한 번이지만 내가 당신을 속일 수 있다는 말에 절반 가격으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물건을 보낸 적도 있다.


중국은 웬만한 것은 자체생산이 되고 있으며 어떠한 기계나 소프트웨어도 출시되면 한 달도 안되여 금방 복제되어 나올 정도로 복제와 모방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수요가 없는 것은 최신 기계를 수입하고 있어 웬만한 첨단 기계를 수입하고 있어 웬만한 첨단기계는 중국에는 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솔직히 목공기계 등을 대량 수출 조건으로 15만 달러 정도 샘플수출을 하였는데 이 기계들을 아무도 쓰지 않으려고 하여 구석에 처박아 놓고 사용하지 않아 갈 때마다 낮이 뜨거워 현장을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 회사의 기계는 거의 대부분이 이태리나 독일 일본 등의 기계인데 워낙 대량 구매이고 투자금이 많이 소요되어 한국산이 대만산보다 훨씬 낫고, 일본에도 OEM수출한다고 큰소리 치는 생산업자의 말을 믿고 수출하였다 망신을 당한 것이다. 친한 관계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내가 전부 변상하여줄 뻔하였다.


또한 우리들의 당면한 문제는 한국인의 투자금도 실지 중국의 가진 사람에 비하면 형편없으면서(내가 있던 북경의 오피스텔 5개를 가지고 있는 오너의 통장에 잔액이 150억인 것을 보고 놀라 자빠진 적이 있다. 이들 말로는 이런 사람이 수두룩하며 마카오에서 도박꾼들의 큰 손은 중국 본토인이며 하루 일억을 날리고도 태연히 손털고 나가고 그 다음날 다시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없는 주제에 있는 체 하며 현지직원을 무시하며 심지어 구타까지 하다가 사고가 나서 문닫은 경우도 보았다.


남의 나라에서 사업을 하려면 여론이 나쁘면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한 · 중 수교시 일본이 중국시장에서의 한국에 대해 제일 두려워했다는 중국에 남겨진 250만의 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조선족이라하는 우리의 교포들은 사업가를 가장한 허풍쟁이 관광객들과 같이 잘못된 한국인에 의해 원수와 같은 관계로 바람직하지 않게 발전했고, 중국의 관리들에게 대접 잘 받고 엉터리 투자 약속 등 이행되지 않는 약속의 남발로 중국 관리들의 분노를 일으켜 이제는 정상적인 기업가들에조차도 피해를 주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중국에 대해서 모르면 철저하게 시간을 두고 인간적인 진솔한 관계를 가진 후 접근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리라 본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난세를 많이 겪어 술수를 워낙 후 접근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리라 본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난세를 많이 겪어 술수를 워낙 많이 부려서 인지 의심이 많아 친해지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상당히 경계를 한다. 그러나 일단 친구로서의 관계가 성립(중국말로 ‘꽌사’라고 함)되고 난 후는 가족처럼 대해주며 그들의 신임은 각별하며 믿고 의지하며 우호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 나도 중국에 오랜 친구가 있어 아주 어려웠을 때 내가 부도 직전의 급한 상황이라는 팩스 한 통에 당시 그 공장 직원의 봉급이 50-60달러일 때 선뜻 20만 달러의 돈을 보내주면서 재기하라고 하면서 자꾸 DA(외상수출)로 계속 물건을 보내주고 결제 독촉은커녕 결제되지 않은 수출 수입상춤의 켜미션도 부쳐주었으며, 그 직원들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던 상품을 물건이 좀 나쁘더라도 비록 소량이지만 무엇이든지 수입해주려 애쓰고 한국에 출장을 왔을 때 고맙다고 선물하려는 나를 이러면 친구가 아니라고 애원하다시피 한사코 거절하는 그들이다.


이런 나에게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 과실송금이나 자본금 회수가 안 되느니 하는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말로 들릴 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의 500대 기업 중 300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거나 지금도 돈을 싸들고 뒤질세라 아시아 어느 나라 다 제쳐두고 중국으로 달려가고 있겠는가.


또한 중국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중국이 60년 혹은 70년대의 한국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없고 나태하고 일을 시켜도 하지 않고 낙후되고 무조건 값싸고 등등.


확실히 생활의 질은 우리보다 못하지만 잘사는 사람은 우리 인구보다 많다는 사실이고 상해의 즐비한 백화점과 북경의 왕푸징, 그리고 중요 도시의 백화점에 가면 수입품으로 넘쳐나지만 한국 상품은 국내 유명 몇몇 제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실이다.


상해에서 그 3시간 거리인 내륙도시 ‘곤명’의 해산물 전문 시장 식당가에 가면 수십 개의 식당이 모여 있는데 수족관에서는 그 먼 거리를 비행기로 공수한 각종 진귀한 살아있는 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으며 싱싱한 각종 해산물이 그득하다. 중국인들은 절대 회를 먹지 않는다. 단지 싱싱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손님이 선택하는 물고기를 무게로 달아 그냥 요리해서 먹는다. 비용은 우리도 돈 내고 먹을 수 없을 비싸나 사람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판이다.


광동성의 동관에 가면 중국의 각종 컴퓨터 및 전자제춤의 전 세계 생산품의 70%를 생산하고 있어 이곳이 마비되면 전 세계의 IT산업이 가동을 중지해야한다는 말이 나고 있는 곳이다. 여기는 숙련된 노동자들이 세계 각국의 합작공장과본지의 기업들이 어우러져 2교대 3교대 24시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리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본 심천, 상해, 북경, 광주, 주해, 대련에서는 모두 다 조금의 봉급을 더 받기 위해 생활의 여유를 포기하고 돈벌이만 된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있다. 심지어 사형을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밀수 마약 뇌물수수 및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경우를 옛날에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많이 자유스러워져서 신문지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지금 중국은 박 정권 때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쫓아가고 있는 듯 하며 실패한 한국경제개발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치밀하게 중간 개발단계를 단축하기 위하여 미국 등 선진국에 있는 눌러 않은 유학생과 화교인재들에게 파격적인 특혜와 보수를 보장하며 인재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또한 인재 유치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들이 중국으로 돌아올 때는 기술뿐만 아니라 경영기법과 범세계적인 네트워크와 투자금융회사들 같은 푸짐한 선물도 같이 끌어오고 있다. 중국은 지금 정부주도로 첨단산업에 엄청난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가 얘기하는 산학협동이 아니라 산학 일치의 정책을 쓰고 있다.


이미 북경정부는 세계적인 ‘청화대학’과 ‘청화공업개발연구원’을 설립하여 60만 평방미터를 무상공여하고 98년부터 5년간 2억 달러를 투자하여 건물을 지어 국내외 첨단 업체들을 유치함과 더불어 중국 벤처 기업에는 각종 연구 설비 공동지원과 인큐베이팅에서 펀딩 및 상장등록까지 지원과 마케팅지원까지 하고 있다. 벌써 5개의 청화 출신기업이 상장되어 있으며 청화대학의 이름이 상표로 쓰이고 있으며 거기서 나오는 이익금이 다시 대학의 연구자금으로 투입되고 있다. 현재까지 200여 개 이상의 회사가 입주해 있으며 2011년 완공시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능가하는 중관춘을 건설한다는 계획으로 열심히 정부와 대학과 기업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뛰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경대학 등에도 비슷한 투자를 하면서 서로 경쟁을 시키고 있다. 홍콩과 붙어 있는 심천에서는 사이버시티라는 투자회사가 역시 60만 평방미타의 대지에 세계 유명 IT업체를 불러모으고, 세계적인 첨단 제품 공장을 유치하여 사이버대학과 상술한 기능을 가진 벤처기업들을 키우고 있다. 홍콩과의 관계강화를 위해 홍콩으로 새로 다리도 건설한다고 한다.


이곳뿐 아니라 중국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엄청난 규모의 단지들이 건설중이다. 내륙니역인 성도에서 중경에서 장사에서 IBM, Microsoft 등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공장과 아울러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연구소를 짓고 제품을 중국 현지서 개발하여 제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여기에다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상해의 포동지구는 매번 갈 때마다 낯설 정도로 변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도 세계적인 금융산업과 IT및 첨단산업에다 물류중심지역으로 만들려는 노력에 전세계 모든 금융회사들이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체 개발하여 발사한 인공위성을 통하여 넓은 대륙을 인터넷 및 이동통신 사업이 급속한 발전이 진행중이며 인터넷 인구는 2005년 3억을 예상하고 휴대폰 가입자는 벌써 1억을 넘어선 상태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CDMA방식을 택하여 세계 유명단말기제조업 및 관련 통신장비업체들끼리 경쟁을 시켜 공장 건설시 수출 50%와 기술이전 등의 악조건 하에서도 중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이러한 무섭도록 냉엄하고 치열한 세계경재의 와중에서 IMF하에서 싼값에 기업이나 건물, 땅 등 딸러만 된다면 무엇이나 헐값에 팔아치우고, 이웃나라에 그 도도한 자존심 버리고 구걸한 돈으로 한국의 벤처 기업들은 무슨 개발된 솔루션 판매 성공이 아니라 종이에 불과한 MOU한 장으로 중국 진출 성공이라는 기사 하나 내기 위하여 피 같은 돈을 중국에 쏟아부으며 주가 올리기에 더 열중이며, 이에 방송장비까지 북경으로 가져와서 열심히 동조한 언론과 이에 참여한 정부 관계자들, 개인적으로는 순진하게 거기에 놀아난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였고, 그 기업에 “묻지마 투자”로 돈을 갖다바친 순진하게 순진하고 멍청하고 과욕에 미쳐버린 우리들 이웃들의 이지러진 얼굴들을 읽으며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구조조정에 실직자가 늘어난다고 아우성치면서 실지 생산현장에게는 인력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해 쓰면서 국가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사이 중국은 바로 발밑까지 열심히 죽을 고생과 희생을 무릅쓰고 달려와 있다. 이들은 지속적인 중소기업위주의 정책으로 성공한 그들의 동족인 대만인에게 꾸준한 우대정책을 펴온 결과 그들과 가까운 복건성과 광동성을 시발로 이들로 인하여 경공업뿐만 아니라 중공업까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보기는 대만기업이 우리에게는 제일 버거운 상대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중국의 우수한 인력이 북경의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상해의 푸단대학 등 출신들에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인구 13억의 중국에서는 자유로운 주거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므로 할당된 학생들만이 이러한 대학에 들어오므로 전 중국에 실제 수많은 천재들이, 우수한 인력들이 전국에 폭넓게 각 분야에서 활동하며 저임금에 만족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 많은 사람이 중국을 다녀갔으면서도 어떻게 중국이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지 그들의 목표는 어딘지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금세기 최대의 황금시장 진입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중소 기업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수출은 커녕 가까운 장래에 국내 시장도 중국에 다 내어주어야 할텐데 여기에 대한 대책은 없는가. 중국이 더 발전하기 전에 중소기업을 잘 훈련하고 키워 중국과의 합작회사로 키워 나가도록 유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서 기회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 아닌가. 


우리가 실제 수출하여 벌어들이는 대기업의 제품은 실제 몇 개 품목이 되지 않는다. 유화학제품도 준비하고 있고 철강 조선 등도 설비확장에 꾸준히 나서고 있고, 상해의 GM과 합작회사에서 생산되는 자동차를 타본 결과 한국산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외에 벤츠 등 여러 나라 자동차 회사의 중국 진출로 우리의 자동차 산업까지 위협받을 것이며, 상해에서는 대만과 합작하는 세계적인 반도체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현재의 일부 상품에서 앞서있고 이들 몇 개 상품에 의해 나라 경제가 좌우되는 마당에 그나마 전 산업이 붕괴되는데 이 제품이라고 오래 가질 않는다고 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나란히 공생하며 국내에서건 세계 각국의 현지에서 동반자 관계로 같이 연구 개발하여 소재나 부품산업도 일류제품으로 만들어 나아가야 세계시장에서 한국 상품과 나아가 한국이 살아나지 않을까. 이건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고 본다.


또한 중국은 극도의 다른 두 개의 사회가 공존하며 또한 언젠가는 터질 수 있는 그러한 양극의 사회인 듯하다. 앞서 언급한 중산층이 이제 갓 피어나지만 소수의 엄청난 가진 자와 대부분의 농촌지역의 개방 후 만성적인 생산부족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이제는 넘쳐나는 농산물로 어려움에 직면한 농민들의 불법적인 도시로의 진출이 서부지역과 대도시 주변의 빈민들의 문제와 어울려 사회 불안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였듯이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나타나는 민주화의 욕구와 전국토의 1/3이상을 차지하면서 살고 있는 티베트, 위구르, 몽고 등 54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의 독립욕구와 불만 등이 평화적으로 슬기롭게 극복할 수만 있다면 이들은 그들의 자신대로 2050년이면 미국을 능가하는 초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또한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쫓아 들어가야 한다. 물론 호랑이에게 도리어 잡아먹히지 않게 단단히 준비하고서 말이다.


 [출처] 71동지회편, 나의 청춘 나의 조국, 71동지회 30년 기념문집, 서울: 나남출판, 2001, pp. 29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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