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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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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2:55 조회133,322회 댓글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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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들



 선경식


 당시 외국어대 행정 4년

 현재 노동일보 편집국 부국장



 글머리에

“과거 국가의 이름으로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의 명예를 국가의 이름으로 회복시켜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바르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결코 패배하지 않고 언젠가는 진가를 역사와 국민이 알아주고 평가하고 존경한다는 한 예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8월 9일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주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대통령은 “나도 약간 희생됐던 사람으로서 감개가 무량하다”고 개인적 소회를 밝혔지만 가슴이 벅차고 감개가 무량한 사람들이 어찌 한둘뿐이랴. 50년 만에 여 · 야간 정권교체를 통해 만주정부를 수립한 국민들 역시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1999년 말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상황을 떠올린다. 우리 국민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가를 세웠지만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때 잘못 낀 단추가 5 · 16쿠데타를 불렀고 장군들의 통치시대를 지속시키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참으로 통탄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고 인권을 총칼로 억누른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그 후계정권을 상대로 온몸을 바쳐 싸운 민주인사들의 피와 눈물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은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민주주의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서도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첫 번째 이야기 - 1965년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학창시절 광주서중 * 일고 교정에 우뚝 서있는 학생탑과 그 비문만큼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없다. 아니 대학을 마친 뒤에도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캄캄한 방의 등대처럼 길을 밝혀주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학생'이라는 말을 '시민'으로 바꾸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주일고 1학년 때인 1964년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국민들은 청구권 자금 몇 푼과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맞바꾼 김(종필)-오히라(大平)메모에 따라 이루어지는 매국적인 한일회담에 분노했다. 시위의 절정을 이룬 6월 3일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65년 봄에는 한일협정 국회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맥을 잇고 있는 광주일고도 그 흐름에 적극 참여했다. 나의 경우 1학년 때는 선배들이 주동한 시위에 동참했지만 2학년 때는 직접 전면에 나섰다.


우리들은 3월부터 쉬는 시간과 방과후를 이용하여 교내외에서 만나 뜻을 모으고 시위를 준비 했다. 특히 강우영 * 김용달 * 안평수 군과 나는 광주고, 조대부고, 광주농고, 숭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수피아여고 등을 분담하여 학생들을 접촉했다. 일제시대 민족정기를 드높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통을 살려 광주시내 모든 고등학교가 동시에 궐기하자고 설득했다. 각 고등학교 대표들은 동시다발적인 시위에 참가하기로 동의하고 추진 상황을 긴밀히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D-day는 5월 3일. 시위 전날 (5월 2일) 나는 김병철 * 안평수 * 윤재근군 등과 함께 강우영군 집에서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양동시장에서 미리 구입한 광목을 잘라 구호를 적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구호의 하나는 "빼앗긴 고기를 동주고 사야 하나"다. 한 동네에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강우영군과 나는 다음날 아침 플래카드를 접어 교복과 러닝셔츠 밑에 감추고 등교했다.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거나 학교 정문에서 교사들이 가방을 뒤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5월 3일 1차 시위는 성공적이었다. 학생들은 교문 앞을 막아선 교사들의 저지를 뚫고 금남로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한일협정 비준 반대의 구호를 외쳤다. 다른 학교의 시위는 광주농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발로 끝났다.


다음날 학교는 바로 문을 닫았고 나와 김병철 * 안평수 * 윤창호 군 등 5명에 대해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광주경찰서는 우리 5명을 바로 불구속 입건했다. 우리들은 광주경찰서에 소환되어 시위 동기와 모의 과정, 배후세력, 한일협정에 대한 견해 등에 관해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으면서 담당 경찰관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담당 경찰관에게 "어른들이 불의를 보고도 잠잠하니까 학생들이 나서는 것이 아니냐"며 따졌다. 사실 나는 경찰관에게 따진다는 의식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어른들의 안이 한 역사의식과 타협적인 현실 인식이 답답하게 느껴져 안타까움을 표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사를 마치고 나온 뒤 함께 조사를 받았던 친구들은 나의 겁없는 태도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서에서는 며칠 뒤 5명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야만 광주일고 시위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일고생들의 데모를 주동한 것은 ' 오직 바른 길'만을 '생명'처럼 추구하는 '피끓는 학생'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붙잡고 반성문을 쓰도록 설득했지만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병철 군도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할 수 있는 게 아니냐"며 "이번 한번만 우리가 물러서자"고 간곡하게 말했다.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반성문을 썼다.(그로부터 10여 년 뒤 '각서'라는 이름의 반성문이 나를 다시 괴롭힐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이에 관한 것을 세 번째 이야기에 나온다.)


얼마 후 휴교가 해제됐다. 무기정학 생태인 5명은 등교를 했지만 수업을 받지는 못했다. 교장실에 붙어 있는 부속실에 갇혀(?) 지내야 했다. 1차 시위를 함께 모의했던 다른 친구들은 다시 2차 시위를 준비하고 6월 초순 실천에 옮겼다. 결국 강우영 * 김용달 * 윤재근 군 등 8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두 번째 이야기-1971년


 박정희 정권은 1970년 가을 1971년 1학기부터 예비역 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교련시간을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는 등 교련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69년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박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학생운동을 위축시키고 통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학내 군사훈련 강화는 위기의식 조장을 통한 대학생 길들이기에 다름 아니었다. 아울러 학생운동에 재갈을 물려 장기집권을 꾀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다.


대학가는 학원병영화를 반대하는 시위에 돌입했다. 그런데 대학가는 교련 강화를 반대하는 대학과 교련 철폐를 주장하는 대학으로 나누어졌다. 교련문제에 대한 인식과 입장의 차이로 운동권이 분열된 것이다. 서울대와 고려대 등이 중심이 된 민주수호전국학생연맹은 교련 철폐를 기치로 내걸었고, 연세대 등이 포진한 민권쟁취청년단은 교련 강화 반대를 외쳤다. 운동권이 이 같은 입장 차이는 결과적으로 대정부투쟁의 강도를 약화시켰고 대국민 홍보 차원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1971년 서울시내 주요 대학 대표들은 양분된 학생운동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이원화된 대학생 조직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각 대학 대표들은 통합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9월 들어 두 조직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저국학생연맹(전학련)을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 시기에 자주 만났던 동지들은 김근태, 장기표, 심재권, 채만수, 이신범, 김건만, 김대곤, 안평수, 김상곤, 조연상, 윤재근, 김대환, 김성호, 채광석, 유인태, 강우영, 장성효 등이었다.


전학련 발족에 합의한 뒤 마지막 남은 문제는 지도부 구성이었다. 동지들은 운동권의 대동단결을 위해 위원장은 기존 조직을 주도했던 대학이 아닌 재 3의 대학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에 뜻을 모았다. 또 각 대학 운동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제시됐다. 이와 함께 71년의 중요성을 감안해 전학련을 이끌어갈 위원장은 4학년이 맡아야 한다는 점에도 의견이 일치됐다.


동지들은 내게 위원장을 맡아주도록 요청했다. 나는 그러한 요청을 받고 꽤나 고민했다. 무엇보다 내가 적임자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전학련 업무에 주력할 경우 나의 기반인 외대 학생운동이 잘 굴러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됐다. 게다가 교직자인 부친의 신상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됐다.


심사숙고한 끝에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부위원장에는 서울대 법대 3학년인 이상덕 동지가 선임됐다. 대학별 업무 분담도 이루어졌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10월 14일 당시 명동에 있던 홍사단에서 전학련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회장인 홍사단 강당에는 "영구적인 학생조직 전학련 만세", "민주 * 민족 *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그러나 사복 경찰들이 길목을 차단하고 학생들은 연행해 가는 바람에 집회를 열 수가 없었다. 박 정권은 전국적인 학생운동 통합조직의 공식 출범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홍사단 강당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날 오후 장기표 선배를 만나 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투쟁 방법과 일정 등을 논의했다. 다음날인 10월 15일 오전 11시 나는 연세대 구내 교수식당에서 전학련위원장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14일 밤 신촌의 여관방에서 작성한 성명서를 통해 전학련 대의원대회를 원천 봉쇄한 박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거물급 부패분자의 처단과 무장군인 고대 난입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민중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기자들은 정부가 조금 전에 위수령을 발동했음을 알려주고 전학련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기자회견 석상에서 위수령 발동 사실을 처음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정부의 강경책에 개의하지 않고 계획대로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답변했다. 기자회견을 서둘러 끝내고 당시 연세대 2학년인 김용석 동지의 안내로 후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자회견 직후 무장군인들이 연세대에 진주하여 학생들을 마구 연행해갔다고 한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서울대 * 연세대 * 고려대 * 한국외국어대 * 경희대 * 서강대 * 성균관대 * 전남대 등 8개 대학에 무장군인과 경찰기동대가 투입되고 무기휴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전국 각 대학에서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데모 주동 학생들을 제적했다.


나는 얼마간의 도피생활 끝에 검거되어 청량리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은 뒤 강제 징집되어 훈련소(31사단 신병교육대)로 끌려갔다. 우리 사회는 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72년 10월 유신으로 온몸을 결박당한 채 길고 어두운 혹한의 터널로 빠져들었다.


세 번째 이야기 - 1975년 ~ 1979년


1969년 3선 개헌을 시도한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 계획을 치밀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71년 대학생 군사훈련(교련) 강화와 이수령 발동, 72년 10월 유신 선포로 영구집권의 야욕을 드러냈다. 1일 독재체제가 국민의 숨통을 끊어놓았고 민주주의는 완전히 말살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린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새싹은 움트는 법. 당국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위축된 운동권은 73년 가을부터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를 준비해 나갔다. 이에 놀란 박 정권은 74년 4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민청학련사건을 일으켰다. 수많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구속되었다.


그래도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사제단의 활동과 목요기도회로 상징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활동은 질식할 것 같은 사회분위기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이와 함께 1971년 강제 입영된 학생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74년 2학기에 복학하였다. 운동권의 전력이 크게 보강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농대생인 김상진 열사가 학생들 집회에서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유서를 낭독하고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회가 술렁거렸다. 운동권과 재야인사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그러자 박 정권은 75년 5월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부정 * 반대 * 왜곡 *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의 개정 및 폐지를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와 그러한 내용이 담긴 유인물의 제작 * 복사 * 소지 * 전달 * 배포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와 관련되 사실의 보도까지 금지했다. 그리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악법이 생겨난 것이다.


위수령 세대인 중앙대 이명준, 고려대 한경남 * 조성우, 서울대 대학원 심지연, 서울대 박홍석, 한국외대 선경식, 연세대 강기종 * 김용석 등은 74년 후반기부터 억압적인 통치 구조에 맞서 싸울 전국적인 학생 조직의 건설에 뜻을 모아갔다.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는 전국 대학생 조직을 결성할 경우 사제단 산하 조직으로 인정해주는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 사건이 정의구현전국학생연맹 사건(일명 명동성당 학생사건)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명동성당이 우리들의 본거지였다. 이기정 보좌신부의 사무실에서 주로 만나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강원대의 최열, 경북대의 여석동, 이화여대 김진선, 연세대의 김철 등이 속속 합류했다. 후배 그룹으로 고려대 김헌웅 * 박계동, 한국외대 정민수 * 우영제 * 민병권 * 윤서영 * 이명복, 서울대 사대 송영길 등이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배를 가장 많이 달고 들어온 '몹쓸 선배'가 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각 대학별로 지하 신문을 제작하고 김상진 열사의 유언 녹음 테이프를 대량 제작하여 보급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다.


우리들은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후인 5월말과 6월초 검거되어 중앙정보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처음에 정의구현전국학생연맹을 민청학련보다 더 큰 조직으로 몰고 갔다. 조사를 받는 동안 조직의 규모나 성격 등을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씩 조서 내용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정보부는 당초 우리 조직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과 김대중씨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을 조작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사실을 시인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들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이윽고 재판. 포승에 묶인 22명이 서소문에 있던 서울지법 대법정에 모였다. 우리들은 서울구치소 감방에서 통방을 통해 사전에 약속한대로 재판을 거부했다. 유신헌법에 의해 형성된 유신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소신이었다. 재판장이 인정심문을 하기 위해 호명할 때마다 거명된 사람들은 재판장의 질문을 무시하고 유신헌법을 반대한다는 소신을 밝히고 재판 거부를 선언했다. 해방 이후 시국사건 사상 최초의 집단 재판 거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판사들(심훈종 재판장 등)과 검사들(변갑규 검사 등)은 물론 변호인들(홍성우 * 조준희 변호사 등)과 가족 등 방청객들은 깜짝 놀랐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 집단적인 재판 거부 투쟁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리라.


재판장은 그래도 재판을 진행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법정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호송 교도관들은 문 앞에 막아서는 등 법정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했다.


재판은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며칠 뒤에 판사가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판사실로 따로 불러 설득했으며 검사도 우리들을 만나 회유했다. 변호사들 역시 구치소로 찾아와 재판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재판장은 결국 재판을 진행하지 못한 채 '법정 소란'을 염려하여 한사람씩 판사실로 불러 신고했다. 공개 재판의 원칙이 훼손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우리들의 재판 거부 투쟁은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사실을 보도하는 것 자체가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10년 구형에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우리들은 항소를 무시하기로 했다. '항소 포기'가 아니었다. 항소 포기는 결국 재판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아닌가. 법전에도 나오지 않는 '항소 무시'는 나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비교적 단기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항소하는 것은 예외로 인정했다.


유신독재정권은 우리들이 옥중 투쟁의 하나로 선택한 '항소 무시'를 '항소 포기'로 간주하고 형을 확장지었다. 형이 확정되자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옮겨졌고 나중에는 마산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광복절이나 성탄절에 앞서 정부는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각서를 쓰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그때마다 각서를 거부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각서를 받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나는 정보부원에게 "나는 잘못한 게 없다. 힘이 없어 붙잡혀 왔을 뿐이다. 이제 그만 괴롭혀라. 박정희가 먼저 죽나 내가 먼저 죽나 보자"고 버텼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각서를 쓸 수 없었다. 만일 각서를 제출한다면 그것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악법 중의 악법인 긴급조치 9호를 인정하고 나아가 유신독재체제를 용인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주동자로 불구속 입건되어 반성문을 쓴 쓰라린 기억이 중첩되기도 했다. 나는 끝까지 버텼다. 모든 대상자들이 각서를 쓰더라도 나까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유신독재 치하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양심으로 남고 싶었다.


나는 유신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0 * 26사태 후인 79년 12월 마산교도소에서 출소했다. 형집행정지가 아닌 형집행면제로 풀려 나왔다. 긴급조치 9호 해제로 나를 붙잡아둘 법적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지 4년 7개월 만이었다. 결과적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자중 최장기 복역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글을 끝내며


 나는 4년 이상을 독방에서 보냈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마루방이 나의 거처였다. 독방에 찾아온 개미와 거미들을 친구로 삼았다. 나는 그들의 생태를 연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감옥에서 양어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갑을 맞이해야 하는 쓰라림을 껶었다. 광주교도소에서 함께 지냈던 민청학련 사건의 이현배 선배와 유인태 동지와 김효순 후배가 출소하기 전 어머니의 회갑에 참석해 아들 노릇을 해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난다. 양어머니와 아버지의 회갑은 이미 지난 터였다. 나는 이들이 78년 1월 어머니 회갑날 서울에서 광주까지 찾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감방 안에서 남몰래 눈물을 쏟았다.


감옥 안에서 무척 시를 쓰고 싶었다. 정말 시다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당시 교도소에서는 필기도구 소지가 금지되어 있었다. 머리 속에 시를 담아두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나는 대나무 젓가락 끝을 시멘트별에 문질러 송곳처럼 만든 뒤 책의 여백에 대나무펜을 눌러 '보이지 않는 시'를 썼다. 옥중시들은 출소 후 <시와 경제>, <시인>, <민중시>, <시와 현실>, <옥중시선집> 등 무크지와 시집에 잇달아 발표됐다.


나는 아직까지 자녀들에게 내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됐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제 민주인사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 글이 실린 책이 출간된 뒤에는 자녀들에게 밤새워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해줄 참이다.


 [출처] 71동지회편, 나의 청춘 나의 조국, 71동지회 30년 기념문집, 서울: 나남출판, 2001, pp. 29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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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님의 댓글

고고학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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